2022년 11월의 월말 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11월에 읽은 책
• <뾰족한 마음 - 지치지 않고 세상에 말 걸기> - 위근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세상의 상냥한 억압 앞에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유난 떤다는 말을 감수해야 한다."
"악의 없는 차별은 오직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차별적 전제와 구조를 인식하고 교정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아직’ 덜 나쁠 수 있는 것이다. 차별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벌어진 차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중략) 알고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악의적 차별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
"다만 감각의 풍부함 대신 강렬한 자극의 경험만이 제공될 때 우리는 아마 삶의 다양한 맥락을 놓치게 될 것이다. (중략)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수익성과 시장 원리만을 근거로 소비 지향적인 문화가 생산될 때, 그것은 획일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뿐이다. 여기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갈수록 다양함을 인식할 능력 자체를 잃어버린다."
• <도쿄 X 라이프스타일> - 정지원, 정혜선, 황지현
• <도쿄 일상산책> - 이체리
- 드디어! 무려 3년 반 만에..! 해외여행 간다. '감각 자본이 충만한 도시' 도쿄로. 여행 이야기는 12월 결산에 커밍쑨.
11월에 즐겨 들은 K팝
인상 깊은 신보가 없어서 패스하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뜬 카라 킬링 보이스 영상에 현생불가. 나 카라 좋아했네.. 새삼 하나하나 다 갓곡들이고, 역시 내 최애곡은 점핑점핑점핑업이고, 신곡 When I Move도 꽤 잘 뽑았고, 라이브 이렇게 잘했나 싶네. 소녀시대에 이어 카라까지, 동년배 2세대 아이돌들이 어느덧 30대가 된 나에게 다시 순수했던 고딩 때의 마음을 갖게 살 수 있게 추억을 선사해줘서 고맙고 뭉클하다.
11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일본 TBS 드라마 <이시코와 하네오 -그런 일로 고소합니까?-> (2022)
- 1화 보고는 긴가민가 했는데 2~3화에서 이 드라마를 엄청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촉이 왔고, 4화 보고 눈물을 흘리며 바로 올해의 드라마 후보로 선정해버렸다. 유튜브 패스트 무비, 전동 킥보드 사고, 맛집 리뷰 등 딱 지금의 현대 사회 이슈를 다루는데, 고소와 재판 과정을 통해 결국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밝혀지고 벌을 받고, 억울하게 피해를 본 소시민들은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는 점이 참 좋았다. 그게 당연해야 하는 건데 이상하게 현실에선 당연한 게 아니니까, 이렇게 픽션으로라도 위안을 얻는다. 투닥투닥하면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최고의 파트너 콤비, 이시다와 하네오카 케미도 사랑스러웠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피해받지 않으며 그저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 때문에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죠. 우리는 법을 다루는 사람들로서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싸울 겁니다."
• 미국 HBO MAX 드라마 <줄리아> (2022)
- "이 프로의 멋진 점은 그런데 있는 거야. 생사가 걸리진 않았으니까. 이 프로는 세상을 구하지도 망치지도 않아." 세상을 구하지도 망치지도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전에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을, 누군가에게는 필요했던 용기를 주는 무해하고 따뜻한 이야기. 가끔은 이렇게 비장함이라고는 1도 없는 드라마 보는 게 좋더라.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2022)
- 어떻게 이렇게 정신없고 기괴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사람을 울릴 수 있는 건지. 거창한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화려한 껍데기들을 다 벗겨보면 결국 본질은 한 모녀의 소통 갈등에 대한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온대도 역시 휴머니즘이 답이다.. 뭐 이런 생각.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에게 좀 더 please be kind.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 속 멀티버스 설정이 너무 천재적이고 충격적이라, 영화를 보는 내내 '지금의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라는 딴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살면서 내린 수많은 선택들로 인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거라면, 내가 가지 않은 길로 가서 살고 있을 다른 버스의 나들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궁금하긴 하다. 근데 혹여 지금의 나보다 행복하고 성공한 내가 있다 해도 바꾸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씩 만족할 줄 알아가는, 지금 내가 있는 이 버스가 좋아.
• 영화 <델마와 루이스> (1991)
- 영화사에 길이길이 남을 최고의 엔딩씬. 마지막 장면에서 내 속에서도 오랫동안 꽉 막혀있던 어떤 감정들이 뻥 뚫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만큼 짙은 여운이 오래 남은 영화.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이 자기답게,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네 잘못이 아니란 걸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 절대 잡히지 말자!"
• 영화 <무드 인디고> (2013)
- 밝고 컬러풀한 전반부는 너무 아름다워서 대리 행복감에 눈물겨웠고, 어두운 잿빛의 후반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오히려 눈물이 쏙 들어갔다. 파국으로 치닫는 스토리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나, 독특한 영상미와 기발한 미장센만으로도 이 영화를 사랑할 이유가 충분했다. 미감 처돌이인 나에게는. 마지막에 남은 찝찝한 마음은 초반의 산뜻함을 떠올리면 금방 개운해지니 괜찮다.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을 때마다 꺼내보고 싶은 영화. 아, 물론 앞부분만. 딱 결혼식 장면까지만..^^
"온전히 내 머릿속에서 나왔으니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보리스 비앙
"만약 우리가 이 순간을 망친다면 다음에 다시 시도하면 돼. 또 실패한다면 그다음에 다시 시도하면 돼. 그렇게 우리 인생 동안에 계속 시도하는 거야."
11월에 인상 깊게 본 콘텐츠
• 왓챠 오리지널 <인사이드 리릭스>
- 언어 천재, 공감 천재, 진행 천재 김이나 작사가와 뮤지션들이 함께하는 가사 이야기. 만년 작사가 지망생으로서 가사 소재라 더 좋았지만, 사실 음악 얘기를 빼도 진짜 으른들의 솔직하고 성숙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미디어 콘텐츠인 것만으로도 가치있었다. 넬 김종완과 불안을 얘기할 때, 윤종신과 '외로움 디폴트론'을 논할 때 화면 속으로 들어가서 같이 눈물을 흘리며 밤새 떠들고 싶었다. 이런 고퀄 프로그램은 정규로 매주 방영해주거나 시즌제로 돌아온다는 약속이라도 해주는 게 예의 아닌지. 왓챠 지지마.. 이겨내줘 제발..
11월에 한 문화생활
• 전시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11월에 먹은 맛있는 음식
- 회식으로 먹은 양꼬치와 오마카세.. 나 회식 좋아했네
- 엄마가 가리비를 왕창 사 오셔서 정말 원 없이 먹었다. 쪄먹고, 구워 먹고, 샤부샤부로 먹고.. 그중에서도 내가 대충 마늘, 버터, 화이트 와인 때려 넣고 만든 가리비 술찜이 제일 맛있었다. 와인이 술술-
11월에 간 카페
- 서촌 동감, 신당 더피터 커피, 동묘 올덴브라운, 송파 리프커피바
11월에 한 생각
- 개인주의에 대해 얘기하는 <인사이드 리릭스> 윤종신 편을 보다가 거하게 치인 포인트가 있었다. 긴 대화의 맥락을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란 너무 어렵지만 대략 이런 내용.
"나는 어떤 부분은 포기하고 산다. 이렇게 포기할 수 있음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심미안이 괜히 그림이 아름답고 그런 게 아니라, 흔히 말하는 '간지 나' 그게 미학이거든."
"인간 심리에 미학적인 원인이 큰데, 어떤 걸 멋있다고 생각하는지가 서로 너무 다르지. 개인주의가 가능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미학적인 관점인 것 같아."
개인주의자의 미학적인 관점. 어쩌면 이건 내가 평생을 찾아온 단어의 조합이 아닐까 싶었을 정도로, 딱 내 가치관에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응당 해야 한다고 하거나 좋다고 말하는 그런 거 말고. 나만의 아름다움, 멋을 찾을 줄 아는 심미관.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노력할 건 노력하고. 왜 저러냐, 유별나다 소리 들어도 내가 멋지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살 거야 나는. 내 기준에서 멋지고 아름답게.
11월에 있었던 일들
- 서촌-청운효자동-경복궁, 덕수궁, 동대문-동묘 일대, 그리고 우리 동네 비밀 산책로까지, 올해 은행나무철도 열심히 돌아다니며 제대로 즐겼다. 살랑이는 가을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걸 보면 꼭 별빛이 쏟아지는 것처럼 황홀해지는 기분. 이제 다시 느끼려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춥고 외로운 긴 겨울부터 견뎌내야 한다.
- 청계산 등산을 다녀왔다. 생각보다 많이 힘들지 않았고, 정상에 올랐을 때 꽤 뿌듯했고, 오르내리며 같이 얘기하고 깔깔대는 시간이 아주 많이 재미있었다. 이전에도 등산을 싫어한 건 아니었지만 해볼 기회가 많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는 함께하면 재미있는 활동이라는 걸 아니까, 기회 있을 때 더 많이 다녀보고 싶다. 선택지를 넓혀가는 일은 늘 즐거워, 짜릿해.
- 원래도 운친자였는데 요즘 독기 올라가지고 한창 크로스핏 동작들 최고 무게 기록 경신하고, 농구에서도 물이 올랐다는 소리를 제법 듣고, 풋살 경기에서 같이 합 맞춰온 파트너와 함께 멀티골을 만들며 멋지게 이번 달을 마무리.. 할 줄 알았는데 무릎이 안 좋아져서 또 한 달 운동 금지다. 슬프고 답답한데 또 한편으로는 내심 쉬고 싶었던 것도 같다. 솔직히 그동안 아픈 거 애써 모른 척하며 무리하긴 했다. 한때 나의 온 마음과 시간과 열정을 왕창 쏟아부을 게 운동밖에 없어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제 연말을 앞두고 그보다 중요한 것들이 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계기가 됐다. 체력과 근력보다 몸과 마음의 건강이 우선이니까 잘 쉬어야지.
11월의 베스트 모먼트
깔끔하게 딱 세 글자로 정리한다.
1. 덕수궁
2. 청계산
3. 멀티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