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의 월말 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10월에 읽은 책
• <뭐든지 가뿐하게 드는 여자> - 정연진
- 크로스핏을 하는 나에게도 제법 친숙한 역도 동작으로 인생을 이야기하다니 이건 좀.. 감동이 심하다. 스내치로 한 번에 들어 올릴 땐 ‘때’가 아니라 ‘흐름’을 읽고 타야 한다는 것. 클린할 때 무거운 바벨이 목을 꽉 짓눌러서 죽을 것 같아도 절대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 믿으면 저크로 쩍!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 운동하고 글 쓰는 여자들이 너무 좋다 나는.. 나도 나이 들어서도 뭐든지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근육형 할머니가 될래요.
"‘묵묵함’이란 재미없어지든, 힘들어지든 일단 받아들이고 피라미드 위층에 가보겠다는 자세다. (중략) ‘인용끌하’ 훈련이 힘든 이유는, 한마디로 “힘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묵묵함’을 상당히 즐기는 사람이다. 세상과 나 사이에 연결된 수많은 선들을 하나씩 차단하고 거대한 공간에 오로지 나, 그리고 내 앞에 놓인 미션만이 남겨진 듯한 느낌을 즐긴다. (중략) 힘든 게 좋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장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미련하게 버틴다."
"옆업의 세계는 평화롭다. 적당한 애정, 적당한 열정, 적당한 수고를 들이면 적당하고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 사람이든, 나이 든 사람이든, 열심히 운동한 결과로 인해 주눅 들지 않을 권리가 있다."
•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 신예희
- 역시 신예희 작가님의 미친 필력. 깔깔대는 사이에 후루룩 다 읽어버렸다. 나는 일을 좋아하고, 일을 잘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다른 부분에는 좀 더 관대해져도 되겠다는 말이 위로가 됐다.
"돈을 쓴다는 건 마음을 쓴다는 거다. 그건 남에게나 나에게나 마찬가지다. (중략) 내 몸뚱이의 쾌적함과 내 마음의 충족감. 이 두 가지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내가 나와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영영 모를 수도 있다."
"업데이트에는 생각보다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 오늘의 내가 구버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낼 것이고 주기적으로 나를 탈탈 털어 재정비할 것이다."
• <다이어트에 지쳤다면 오늘부터 습관 리셋> - 한형경
- 딱히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지친 것도 아니지만, 요즘 이렇게까지 운동을 많이 하는데 왜 수치는 거꾸로 가는지가 좀 궁금해서 읽어봤다. 그냥 많이 먹어서라는 결론만 나옴.
10월에 즐겨 들은 K팝
- 윤하 '사건의 지평선'
- 슬기 'Anywhere But Home'
- 르세라핌 'Blue Flame'
- 스트레이키즈 'CASE 143'
- (여자)아이들 'Nxde'
- 재현 'Forever Only'
10월에 인상 깊게 본 콘텐츠
• 미국 영화 <코다> (2021)
- 청각 장애인 가족 이야기인데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노래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조금 슬플 뻔했다. 하지만 아빠, 엄마, 오빠는 그 순간 훨씬 더 큰 감동을 느꼈겠지. 행복한 루비의 표정과 관객들의 얼굴을 통해 그 아름다운 노래를 보았겠지. 말이 안 통할 때는 있어도 마음은 통한다니까.
• 넷플릭스 오리지널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 2>
- 다들 환승연애2 볼 때 나는 꿋꿋이 블라인드 러브2 봤다. 도파민 쫙쫙 올라가는 최고의 길티 플레저다. 서로 얼굴은 모른 채 대화만으로 서로를 알아가다 바로 청혼과 약혼을 하고, 얼굴 보자마자 신혼여행 가고, 돌아오자마자 결혼 준비 2주 하고 바로 식 올려버리는 미친 전개. 특히 시즌2는 결혼식 그 후 편들이 재밌었다. 서로 싸우고 헐뜯다가도 절친이 되고, 기존 커플은 위기를 맞고, 새로운 커플이 탄생하고 아주 난리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걸 여과 없이 보여주는 미국 리얼리티 클라스. 막장 드라마 각본도 이렇게는 못 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능력 있고 성격도 당찬데, 어색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맬러리에게 감정 이입을 많이 했다. 마지막에 너무 짠했어.. 언니 꼭 행복해야 돼.
"저는 사람들이 제게 다가오는 걸 무척 어렵게 만들더라고요. 썩 다정한 사람도 아니고 연약한 사람도 아니고요. 누군가와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신뢰가 필요한데, 저한텐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면서도 더 잘하고 싶은 일이에요."
"확실히 해 두자면 나는 있기 싫은 곳에는 안 있어." "앞으로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는 않을 거야."
10월에 잘한 소비
- 나의 유일한 애착 패션템 선글라스. 너무 멋 부린 것 같지 않고 그냥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견고한 선글라스가 필요하던 참에 성수동에서 우연히 괜찮은 모델을 발견해 바로 질렀다. 생각해 보니 해외여행 가는 길 공항 면세점에서 새 선글라스 하나씩 장만하는 게 소소한 기쁨이었는데, 오랜만에 그 설렘을 느껴본 것 같다.
- 입을 만한 F/W 옷이 많지 않아 하루 날 잡고 거하게 쇼핑을 했다. 옷을 잘 입는다거나 신경 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 나에게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어떤 옷이 필요한지는 잘 아는 나이가 된 것 같다. 물론 운동복 위주로 장만하긴 했지만..
10월에 간 카페
- 종로 퍼블릭가든, 충무로 섬광, 성수 스탠드업플리즈바이턴온, 성수 오우드, 삼성 포스톤즈커피로스터스, 군자 보난자커피, 종로 열시꽃, 종로 텅
10월에 한 생각
풋살 경기 출전 엔트리팀 팀장을 맡아 한 달 내내 거의 풋살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유튜브 계속 찾아보며 공부하고 프로그램 짜고, 주말 자체 훈련을 진행하고, 연습 영상 돌려보며 최적의 합을 만들 수 있는 포지션과 라인업을 고민했다. 처음에는 부담도 됐지만 또 잘 해내고 싶어서 너무 열심히 해버렸다. 경력은 짧지만 열정은 짧지 않은 멤버들과 우리도 합을 맞추면 멋진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대망의 경기날, 10분씩 두 경기 딱 20분을 뛰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다 느꼈다. 한 달 전엔 패스 연결도 안 되던 우리가 이제 플레이를 만들어 나가고, 눈만 봐도 서로가 어떻게 뛸지를 알고 믿고 공을 주는 게 다 보여서 연신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때는,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골을 넣지 못하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졌다. 나보다 같이 고생한 동료가 골 넣었을 때 훨씬 더 기쁘고, 내가 수비하다 뚫렸는데 뒤에서 우리 팀이 나타나 주면 너무 고맙고, 이기고 나서 마음껏 기뻐하며 서로 덕분이라며 박수 쳐주고, 져도 실망하지 않고 토닥이며 잘했다고 위로해주는, 우리가 한 팀이라는 것 자체가 소중해졌다.
나의 인생 곡이자 골 넣으면 세리머니로 틀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데이식스의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그날 골 없이도 내 머릿속에서 수십 번 울려 퍼졌고, 뒤풀이에서는 별안간 울고 있는 나를 위해 팀원들이 실제로 틀어줘서 더더욱 잊을 수가 없다.
"솔직히 나에게도 지금 이 순간은 꿈만 같아 너와 함께라 오늘을 위해 꽤 많은 걸 준비해 봤어"
"솔직히 나보다도 네가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거라고 믿어 오늘을 위해 그저 견뎌줘서 고마워"
순탄하지만은 않았기에 그러나 함께 최선을 다했기에 정말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한 페이지가 된 순간. 후.. 과몰입 그만해야 되는데, 그게 되나 적당히 좋아하는 게.
10월에 있었던 일들
- 거짓말처럼 10월의 절반은 일이 너무 많아서 제발 조금만 쉬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힘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갑자기 모든 일이 중단되거나 연기되어 뜻밖의 여유가 생겨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대체 언제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들 앞에서 유연해질까.
- 공교롭게도 그 '10월 절반'에 해당하는 날은 내 생일이었다. 카톡이 멈춰버린 상황에서도 대면, 문자, 전화, 이메일, 손 편지 등 다양한 루트로 전해받은, 나를 생각해주는 다정한 마음들이 참 소중했다. 이제는 내 주위에도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 나도 그들을 위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 교집합이라는 이유로 얼떨결에 축구-농구 동호회 연합 운동회 준비 위원 겸 총무 겸 진행자를 맡았다. 내가 좋아하는 두 집단의 건강하고 유쾌한 만남을 지켜보니 하길 잘했다 싶었고 보람 있었다. 그날 무려 4차까지 간 뒤풀이에서 내가 취해서 "우린 다른 요일, 다른 운동장에 있었을 뿐, 팀 스포츠를 하는 마음만은 똑같아" 따위의 말을 지껄였던 것 같은데 사실 진심이긴 했다. 우리처럼 운동을 사랑하는 직장인 여성들이 더 크게, 자주, 많이 모일 기회가 생겨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이 되어주면 좋겠다. 언젠가는 직장인 여성 운동회도 열 수 있지 않을까.
- 바쁜 와중에도 놓칠 수 없었던 최애 계절 가을, 최애 달 10월 찬양. 유독 날씨가 좋은 날들이 많아 틈만 나면 밖에 나가 계절의 아름다움을 한껏 누렸다. 을지로-광장시장, 잠실 한강, 성수동-서울숲, 군자동-어린이대공원, 인사동-북촌-창덕궁·창경궁. 서울 나들이 맛집-카페-산책 코스 짜기 자격증 같은 게 있다면 1급은 따놓은 당상 아닐까 하는 망상을 했을 정도로, 내가 생각해도 완벽했던 일상 속 작은 여행들.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아무리 바빠도 낭만을 잃지 말자.
10월의 베스트 모먼트
1. 모든 게 감사하고 행복했던, 아주 알차게 꽉꽉 채워 보낸 생일날
2. 그림 같은 하늘 아래 서울숲-한강, 어린이대공원, 북촌-창경궁 산책
3. 풋살 경기날 열심히 뛰고, 진심을 다해 응원하고, 다 같이 기뻐한 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