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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Sep 30. 2022

9월, 오래 볼 사람일수록 일찍 실망시키기

2022년 9월의 월말 결산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까워 남겨두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매달을 기록해둡니다.




9월에 읽은 책

• <다정소감> - 김혼비

- 박소영 작가가 추천사에 김혼비 작가와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친구라고, 그의 글을 읽으면 친구가 된다고 썼듯이 나에게 김혼비 작가는 (당연히 일면식도 없지만) 내 인생의 멘토 선배 같은 존재다. '아무튼 술'에서는 우리가 지나온 시절에 동질감을 느꼈고,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에서는 나도 곧 이렇게 멋진 경험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엿보았고, '전국축제자랑'에서는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 할 말은 하는 태도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정소감'은 그 모든 것들의 총집합 같았다. 이제 나는 내가 받은 다정들을 소중히 대하고, 나도 더 큰 다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다짐해본다.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중략)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 <프리워커스> - 모빌스 그룹

- 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거리를 많이 던져 준 책. 회사에 소속되어 있든 아니든, 스스로 일하는 방식을 찾는 주체적인 사람이라면 프리워커라고 한다. 자유롭고 싶어 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성장하고 싶어 하는 나는 어떻게 일하는 게 좋을까.

"지금 무기력하다면 뭔가를 탓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내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을 찾아 나서는 게 이득이다."
"관성적으로 일할 땐 하루가 지루했는데, 그날의 루틴을 계획하고 그대로 해나가다 보니 매일의 만족이 생겼고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만든 시간 속에서 산다는 느낌이 나를 오랜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했다."
"기록의 시작은 엉성할수록 좋다. 기록이 쌓인 후 만들어진 것과 비교했을 때의 낙차로 결과물은 더 빛난다. 부디 가벼움을 잃지 말고, 부담은 가능한 내려두길."
"빈틈을 보여주기 전에는 빈틈으로 물이 샐 거라고만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괜한 걱정일 뿐이었던 것 같다. 빈틈을 통해서 바람도 솔솔 통하고 빛도 들어왔다. 이제는 캄캄한 어둠이 두렵지만은 않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는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빈틈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자."

"누구든지 웬만한 정도의 상식과 경험만 있다면, 자기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방식 자체가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모든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것을 대표해야 하며,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겠다는 오만에서 벗어나면 모든 일이 수월해진다." -세스 고딘
 "실험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틀릴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다." -시어도어 다이먼 <배우는 법을 배우기>


• <무인양품 문방구> - GB 편집부

- 실사용의 편의성과 디자인적 심미성을  마리 토끼를  잡은 무인양품의 문구 제품 설명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아크릴 투명 자인데, 여백 없이 끝에서부터   있게 눈금을 표시해두고, 왼쪽 방향에서부터도   있게 왼손잡이용 눈금을 추가해뒀단다. 자처럼 단순한 사물에도 개선될 여지가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일본 브랜드 특유의 이런 (좋은 의미로) 변태 같은 섬세함을 사랑한다. 아무래도 조만간 도쿄에 가야   같다.


• <따님이 기가 세요> - 하말넘많

"운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귀신같이 비켜간다고 생각한다. (중략)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실패와 입으로만 열심히 하겠다고 외치며 필연적으로 걷는 실패의 길은 전혀 다른 성장의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믿는다."


9월에 즐겨 들은 K팝

• 블랙핑크 'Shut Down'

- 언젠가부터 블랙핑크 노래는 나에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잘 안 듣게 됐는데 '셧다운'은 한번 듣고 바로 꽂혔다. 익숙한 클래식 선율에 힙합 비트를 끼얹으니 간지 폭발, 중간에 제니-리사 랩 파트는 진짜 무릎 꿇고 들었다. 지금 활동하는 K팝 그룹 중 단연 가장 제대로 힙합을 하는 그룹. 블랙핑크가 국힙원탑이다..


• NMIXX 'Cool'

- 돌아온 나의 아기 개그맨들, 아니 아기 명창들. 미안하지만 타이틀곡 'DICE'는 전작 'O.O' 보다도 난해해서 당황스러웠는데, 수록곡이 보석이었다. 선선한 이 계절에 찰떡이고 살짝 몽환적이면서도 무겁지 않게 적당히 애절한 무드를 풍기는데 멤버들 전체가 다 가창력으로 다 찢어놓는 노래가 신인 걸그룹 싱글 수록곡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거임? 특히 배이 도입부는 너무 좋아서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 역시 노래 잘하는 가수가 최고다. 누가 뭐래도 내 마음속 올해 여자 신인상은 엔믹스 그대들이야.


• NCT127 '윤슬'

- 타이틀곡 스킵하고 수록곡만 파게 된 또 하나의 케이스. '천사들의 합창'이라는 댓글을 봤는데 과장 조금 보태면 진짜 그런 느낌이 든다. 특히 도영과 해찬 음색으로 이런 예쁜 가사를 부르는 구간은 너무 간지럽고 달아서 금방이라도 고막이 녹아내릴 것만 같다. "잘 자 내 달빛 이리 와서 안겨 깊숙이 밤이 수 놓인 잔물결 위로 누워 아마 너는 모르지 얼마나 네 빛이 예쁜지 금세 잔뜩 닿아 반짝이잖니 금색 길을 내어 나를 빛내지"


 그리고 어쩌다 알고리즘에 이끌려 가장 많이 본 라이브 영상은 몬스타엑스 'Secrets' 밴드 라이브 버전. 대놓고 풍기는 으른미와 남성미. 나 이런 거 좋아했네.. 아니, 그보다 이 팀 메보랑 래퍼들 잘하는 건 워낙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영상은 민혁과 형원의 재발견이었다. 이 곡 형원 자작곡이라는 거 알고 기절. 내가 '노 머씨' 볼 때만 해도 이 분들 안 이랬는데 성장이란.. 


9월에 본 영화와 드라마

• 일본 NHK 드라마 <사랑할 수 없는 두 사람> (2022)

- 연애 감정이 없는 에이로맨틱이자 성적으로도 타인에게 끌리지 않는 에이섹슈얼인 남녀가 한 집에 같이 살게 되면서 부부나 애인이 아닌,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며 각자의 행복을 찾는 이야기. 이 지독한 연애지상주의 사회에 단비 같은 신선한 힐링 드라마였다. 인간이 결코 혼자서만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라면, 이 드라마에서 말하는 가족이라는 존재, 다른 말로 아군, 내 편, 돌아갈 곳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것 같다. 무조건 연애나 결혼을 강요할 게 아니라. 굳이 상대의 존재를 설명하거나 명명할 필요도, 남들 앞에서 영원을 약속할 필요도 없다. 순간의 믿음과 최선이 있으면 된다.

"자기가 정하지 않은 것이 억지로 정해지는 게 싫을 뿐이에요."
"당신의 보통을 강요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것도 단정 짓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말로 하면 거기에 얽매여 버려요. 주위에서 정한 ‘평범함'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우리들마저도.. 소중한 것이나 사고방식도 계속 바뀌어 가니까 그때의 최선을 생각하면 되고."
"그럼에도 무언가를 말해 오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내 인생에 무언가를 말해도 되는 것은 나뿐이다. 나의 행복을 정하는 것은 나뿐이다."


• 영화 <카조니어> (2020)

- 태어나 단 한 번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착취만 당해 감정 없이 자라온 여성이 마침내 사랑이라는 게 뭔지를 배우기까지. 올드 돌리오의 인생은 멜라니를 만나고부터 새로 시작됐다고 믿는다. given family가 아닌 chosen family를 만나고 행복을 찾길. 그리고 스포가 될까 봐 자세히 묘사할 수는 없지만 중반부에 나오는 엄청 까만 장면과 후반부에 나오는 엄청 하얀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충격에 가까운 엄청난 임팩트를 느꼈다. 연출적으로도 만족스러웠던 영화.

"원래 행복은 이렇게 쓸데없는 짓에서 오는 거야."


•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파트너 트랙> (2022)

- 정말 뻔하디 뻔하다. 뉴욕 사는 영 프로페셔널 우먼이 회사에서 우당탕탕 사고 치는데 어찌저찌 해결해내고, 회사 동료면서 절친인 친구들과의 우정을 잠깐 소홀히 했다가 화해하고 (그중 하나는 꼭 LGBT),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삼각관계를 그리는데 두 놈 다 영 시원치 않은.. 아주 전형적인 섹더시 계열의 미국 로맨스물. 그렇게까지 재밌지 않았는데 마지막 반전에 뒤통수 너무 세게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시즌2를 기다리게 돼버렸다는 점이 좀 킹 받는 포인트. 어쨌든 주인공이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은 꽤나 신선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남을 걱정하면 너만 다쳐. 희생해도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어. 가끔 구분하기가 정말 어려울 뿐이지."


9월에 한 문화생활

• 소녀시대 스페셜 이벤트 'Long Lasting Love'

- 15주년 기념 팬미팅. 칼각 잡힌 오프닝 '소원을 말해봐'부터 "다시 태어나도 널 사랑할게"를 목놓아 외친 'FOREVER 1', 라이브로 꼭 들어보고 싶었던 내가 좋아하는 수록곡 'Closer'와 'Light up the sky', 전주만 들어도 심장 터질 것 같이 벅차오르던 '다시 만난 세계', 전 구간 전 국민 떼창 가능한 대히트곡 'Kissing you', 'Gee'까지. 오랜만에 소녀시대 무대를 보며 고딩 때부터 대학생, 교환학생, 취준, 그리고 사회초년생 시절까지, 나의 지난 15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시절 모든 추억 곳곳에 소녀시대 노래들이 있어줬기에 참 고마웠다. 우리 언니들 소소한 코너들도 다 너무 열심히 해서 빵빵 터뜨리고, 스타성 여전히 미쳤고, 현역보다 더 현역 그 자체의 폼과 무대 퀄리티를 보여줘서 더더욱 고마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워하지 말고 기대했으면 좋겠다는 말 기억해요. 언제라도 괜찮으니 소녀시대에게 꼭 다음이 있기를.


9월에 잘한 소비

- 크로스핏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려고 무릎보호대랑 그립 테이프를 샀다. 무게 더 치고 싶어서 아마 허리보호대도 곧 살 것 같다. 물욕 없는 편인 내가 장비 욕심 생길 정도면 중증인 건데..


9월에 간 카페

- 연희동 데스툴, 피시스오브서울

- 문래동 무슨클럽


9월에 한 생각

-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왔다. 농담으로라도 "실망이야"라는 말을 들으면 크게 상처받고, 종종 상대의 표정과 말투에서 내 멋대로 실망을 읽어내고 깊은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항상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고, 뭐든 척척 잘 해내고, 남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며 사는 건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 된다.

 이제부터 가족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조금씩 실망시키며 살기로 했다. 실수도 하고, 거절도 하고, 반항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기 전에 내가 뭘 원하는지부터 말해도 보고. 지속 가능한 건강한 관계를 위해, 오래 볼 사람들일수록 나의 진짜 마음을 솔직하게 다 보여주고 일찍 실망시키기. 내 마음도 다른 이의 감정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다투고 사과하고 타협하며 지내기.


9월에 있었던 일들

- 어쩐지 한여름보다도 뜨거웠던 것 같은 9월 초, 친구들과 함께 가평 빠지에 놀러 갔다. 너무 재미있어서 놀이기구 타는 내내 미친 사람처럼 깔깔대며 웃었다. 나는 분명 겁이 많고 수영도 잘 못하는데 의외로 스피드를 꽤나 즐기는 편이고, 바람과 물이 주는 시원한 촉각·시각적인 요소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다. 이제 매년 여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바삭바삭한 햇빛이 부서져내리는 강물 위를 가로질러 달리며 온 몸으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그 황홀한 경험 절대 못 잊어.. 다음 날 숙취도 못 잊어..


- 구체적인 경제적 목표가 생겼고 내년 중에 이룰 수 있도록 이제라도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해서 돈을 모아보려 한다. 보다 자유롭고 단단한 삶을 위하여.


- 그밖에는 일과 풋살로 꽉 채운 한 달. 일은 그냥 일이 많아서 많이 했고, 풋살은 재미있어서 많이 했다.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면 바쁜 건 버틸 수 있는데, 운동과 병행할 수 있을 정도로만 바빴으면 좋겠다. 제발.. 회사야 다른 거 다 뺏어 가도 내 삶에서 운동만은 빼앗지 마.


- 9월은 유난히 노을이 아름다운 달. 바쁜 와중에도 부지런히 하늘을 보러 나갔고, 유난 떨며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계절이 주는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사람으로 쭉 살아가고 싶다.


9월의 베스트 모먼트

1. 놀이기구 타고 청평호 한가운데를 질주하던 순간들

2. 소녀시대 팬미팅 앵콜 첫곡으로 울려 퍼지는 다만세 전주에 벅차오르던 마음

3. 오랜만에 학교 캠퍼스에 가봤는데 잠깐 20살의 나로 돌아간 듯한 풋풋한 기분이 느껴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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