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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내가 찾던
이상형을 만났다.

3. 도쿄 Book and Bed의 알딸딸한 효케츠

by 이리터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좋아하는 게 많은데, 그만큼 싫어하는 것도 많다. 좋게 말하면 취향이 확고하고, 나쁘게 말하면 까다롭다. 말수가 적은 편이지만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는 족히 한 시간은 혼자 떠들 수 있다. 아직까지는 내가 바라는 나와 딱 맞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뿐이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나에게만 완벽한 인물을 상상 속에서 빚으며, 현실 연애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러던 내가 여행 중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만났다. 단, 그는 사람이 아닌, 어느 공간인 게 함정이지만.



BOOK AND BED TOKYO


도쿄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책장 컨셉의 호스텔이다. 거대한 책장에 올라타 그 사이 다락에 웅크려 앉아 책을 읽고, 이불속에서 책을 몇 권 쌓아놓고 읽다가 스르륵 잠들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그런 로망을 실현시켜줄 곳이다.


체크인 안내 데스크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한 입구에서 벨을 누르면 드르륵 나무 창문이 열리고 체크인을 한다. 북앤베드로 입장하는 비밀번호를 받고 떨리는 마음으로 꾹꾹 누르면 거대한 나무 문이 열린다.


'Have a Book Night'

북앤베드 전경
북앤베드 전경

책 보며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공간이다. 조금 어둡지만 분위기 있는 조명에, 마음 편해지는 나무와 종이 냄새, 고요한 적막을 깨 주는 정체 모를 비트의 몽환적인 음악, 푹신한 쿠션까지... 책&감성 덕후의 오감을 완벽하게 충족시켜준다.


책장 속 북쉘프 베드 (프리미엄)
왼쪽은 화장실과 샤워실, 오른쪽은 벙크 베드 (스탠다드)


단순히 좋았던 하룻밤 숙소, 흥미로운 공간 수준을 넘어 '나의 이상형'이라고 까지 표현한 이유,

북앤베드와 내 이상형의 8가지 공통점

1. 겉모습이 크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


2. 그냥 무심한 듯 시크하게


3. 있을 것만 '깔끔하게' 있으면 된다.


4. 단, 자기만의 취향이나 정체성은 뚜렷해야 한다. 천장에 매달아둔 책처럼, 대놓고가 아니라 관심 갖고 찾아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일 정도로 그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낼 줄 알았으면 좋겠다.


5. 그러나 자기 세상에 갇혀 있지 않고, 바깥세상과 소통하며 다른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오픈 마인드에


6. 두꺼운 소설, 전문서적부터 가벼운 만화책이나 여행잡지까지... 아는 것도 많고, 관심 분야도 많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TPO에 따라 다큐-예능 간 전환이 가능하며 대화 커버리지가 넓어야 한다는 점.


7. 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쓱 다가오는 배려와 센스


8. 그리고 나를 세상 따뜻하고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었으면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안될 거라고 아마...)



수 천 권의 책더미에서 부담 없이 원하는 책을 고르고,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을 보는 편안한 밤이다.


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나는 영어로 된 책을 고를 수밖에. 사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매거진B의 츠타야 편을 읽고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질렀던 도쿄행이었다. 실제 다이칸야마 T-Site 츠타야를 경험하고, 도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후 다시 한번 (영어로) 읽는 매거진B의 츠타야는 또 새로웠다.


나를 도쿄로 데려온 츠타야, 다음 여행 행선지로 데려갈 에이스호텔,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꿈나라로 데려다 줄 약간의 알코올과 함께한 'book night'


매거진B 에이스호텔, 츠타야 편


이 분위기에 곁들인 음료로 기린에서 나온 효케츠 자몽맛을 골랐다. 알코올의 탈을 쓴 자몽주스겠거니.. 하고 마셨는데 웬걸, 자몽향을 입힌 술에 가까웠다. 너무 좋잖아!


20살 대학 새내기 시절, 처음 과일소주를 맛보던 날이 떠올랐다. 입학 후 줄곧 나는 소주를 잘 못 마신다 믿어왔는데 이런 소주라면 피쳐로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말 그렇게 마시다 금방 취한 건 안 비밀. 맞은편에 앉아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보며 웃던, 어린 마음에 잠깐 짝사랑했던 훈남 선배가 생각났다. (...선배, 잘 지내죠?) 그러고 보니 그 선배 내 이상형에 가까웠네. 북앤베드랑 닮았네. 그렇네.


그렇게 잠에 들었다.



흡사 관 속 같이 불편한 벙크 베드에서 잠을 설치고 보니 다음날 아침,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은 이들도 있었다. 아마 모든 것이 너무나도 완벽한 이 곳에 빠져버린, 나와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내 이상형의 경쟁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북앤베드에서 묵은 게 벌써 1년 반 전인데, 첫눈에 반한 운명의 상대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북앤베드를 잊지 못해 계속 아른거린다. 조만간 한 번 더 갈 계획인데 이상형과의 두 번째 만남은 어떨까? 또 한 번 감탄하고 더 사랑에 빠질까? 아니면 금세 질리고 깰까? 뭐든 좋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정도면 상사병이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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