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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May 03. 2020

1917, 상황이 곧 서사다.

죽음의 공간 속에서 갈구하는 '생명'.

집에서 엄마와 함께 샘 멘데스의 <1917>을 다시 봤다. 나로서는 2회차 관람이다. ( IPTV로도 볼 수 있지만, 영화관에서 꼭 보기를 권한다!)


20세기의 세계 대전은 인간을 위해 발달한 기술 문명이 인간을 얼마나 비웃듯 유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극중에 등장하는 참호는 어떤 공간인가? 참호를 빼곡하게 매운 젊은 병사들.. 각 진영의 참호와 참호 너머를 가득 채우고 있는  철조망, 그리고 쓰레기처럼 나뒹구는 시체의 무덤.  


이 곳에서 체리나무와 희망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최후반에 등장하는 매켄지 중령의 말처럼, 희망은 가장 위험한 것이 되기 바련이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 그리고 토머스 뉴먼은 이 비정한 시공간을 아름답게 그렸다. 이 영화는 단연 기술의 승리, 분업의 승리다.


<1917>은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전쟁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  죽음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주인공이 오로지 '생명'이라는 가치만을 향해 질주하는 과정이 영화의 테마다. 죽음의 공간을 뚫고 가는 스코필드의 눈빛에는 생존에 대한 욕구, 그리고 광기라 할만한 것도 비친다. 나에게는 그 과정이 그 어떤 애국 서사보다 숭고하게 느껴졌다. (나는 공동체보다 개인에게 끌리는 인간이기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서사가 단조로워서 별로다'라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의도된 단조로움을 두고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 하다. 이 영화 속의 세상은 통곡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 곳이다.


때로는 상황 자체가 곧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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