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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Jul 10. 2020

박원순의 죽음.


혼란스러운 밤을 보내고 다시 생각을 정리.


1. 얼마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삶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자의 갑작스런 죽음이 주는 황망함. 나는 실망감과 분노가 몹시 커서, 애도를 표할 수 없다. 그러나 명복을 비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떻게 명복을 빌 수 있느냐'는 논쟁은 소모적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대할 자격이 있다.


2. 우리는 다시 한번 거물급 정치인의 자살을 마주하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시 이명박 정권이 가했던 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렸다. 당시 유시민 작가는 ‘죽음의 원인 자체는 정치적인 죽음이나 죽음 그 자체는 지극히 인간적인 죽음’이라고 평가했다. 정치자금법으로 수사받다가 2018년 7월 세상을 떠난 노회찬 전 의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유서에서 정치자금 수수에 대한 죄책감을 드러내는 한편, 청탁과 대가는 없었다며 마지막 항변을 했다. 그리고 정의당 당원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 자신이 삶에서 높이 추켜들었던 가치, 도덕주의와 '정의'가 주는 무게감. 그것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는 차이가 있다. 바로 '피해자'라는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세상을 등졌다. 피의자 사망으로 인해 수사권은 종결되었고, 피해 사실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회복할 기회는 사라졌다. 고인은 유서에서 ‘내 삶에서 함께 한 사람들’과 ‘가족’을 언급했으나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비겁한 결정이다.


3. 안희정은 김지은씨의 미투 폭로가 터진 날까지 '성평등'을 논하고 있었다. 안희정은 번지르르한 말 뿐이었다면, 박원순은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이슈에 관련하여 실질적 행보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그는 1986년 군사 정권 당시, 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경찰서에서 벌어진 성고문의 피해자를 변론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인 권인숙 의원이 그 주인공이다. 고인은 90년대 한국 최초의 성희롱 소송 사건이었던 '서울대 우조교 사건'을 변론하면서 성희롱도 범죄라는 인식을 정립하기도 했다. 그는 그의 저서 [ 악법은 법이 아니다 ]에서 그의 변론 경험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문장을 덧붙였다.


“인간의 가치, 인격의 중함, 그것이 손상될 때의 아픔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세상은 우리가 살고자 하는 곳일 수 없다.“(282쪽)


내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것은 이 지점이다.직장 내 성적 괴롭힘(sexual sexual harassment)의 개념을 국내에 도입하고, 1998년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던 인권 변호사 박원순. 그리고 가해지목인이 된 박원순 시장. 이 둘은 같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고소장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남성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인간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된다.


4. 충격의 한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권력형 성범죄’를 고발한 피해자에게 위로를 보내는 것, 그리고 그를 지키는 일이다. 온, 오프라인 공간을 막론하고 펼쳐지는 모든 종류의 2차 가해를 막아야 한다. 함부로 '정치적 공작'을 운운하고 신상을 유출하거나, 피해자를 추측하는 일도 단호히 막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미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발본색원을 해서 고소인을 찾아내자’는 게시물이 종종 등장하고 있다. 가해지목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수사는 시작해보지도 못 하고 끝났다. 피해자는 고소장을 제출한 날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격의 중함'을 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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