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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파 Jan 25. 2021

에픽하이가 18년을 기념하는 방법.

< EPIK HIGH IS HERE 上 >


“난 이 세상의 밑바닥이 아닌 밑받침 한숨은 쉬어도 내 꿈은 절대 쉬지 못해”


- 실어증(에픽하이, 2007) 중



200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또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마음 속의 에픽하이’를 간직하고 있다. 나에게도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친구들과 차별화되고 싶었던 학창 시절, 타블로의 문학적인 가사를 외우고 따라 불렀다. 그들의 노래에 위로받고 있다고 느낀 순간 역시 많다. 그룹 에픽하이(타블로, 미쓰라, 투컷)는 사랑과 개인적인 번뇌,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두루 그려 왔다. 에픽하이는 전형적이지 않은 표현을 택했고, ‘서사적인 높음’을 성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득히 멀리 있는 구도자들이 아니었다. TV 쇼의 스타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Fly'와 ’우산‘, ’Love Love Love' 등 히트송을 만드는 데에도 능했다. 누군가는 힙합에 대한 배신을 논했다. 그러나 당대에 에픽하이만큼 가요와 힙합을 매개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 <쇼미더머니 9>의 우승자 릴보이와 쿤디판다 역시 에픽하이의 영향권에 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에픽하이는 영광과 오욕을 모두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싸이월드 시대와 인스타그램 시대를 모두 관통하며 자리를 지켰다. 며칠 전에는 스포티파이가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에픽하이의 모습을 크게 띄우기도 했다.


데뷔 18년이 되는 해, 에픽하이가 정규 10집 <EPIK HIGH IS HERE>의 첫번째 파트 ‘上’을 발표했다. 2CD로 구성된 10집의 절반이다. 문을 여는 트랙은 타블로의 ‘Lesson Zero'다. 1집부터 시작된 ’레슨 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다. 'Lesson One(2003)’에서 타블로는 천재는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모든 대답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타블로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기억되고 있는 가사를 보기 좋게 전복시킨다.


Now I see,the question to all answers will only bring me to my knees and back to zero/ 이제보여, 모든 답을 향한 내 질문들은 나를 무릎 꿇게만 할 것이고 나를 0으로 되돌리기만 할 것을

- ‘Lesson Zero(에픽하이)’ 중


‘위험한 꿈을 꾸는 젊은이’였던 그는, 현실을 관조하고, 염세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년이 되었다. 자신이 믿고 있었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0’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만나본 적 없는 전염병도 창궐했던 2020년이지 않는가. 우리는 ‘코로나 19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다. 코로나 19는 사회경제적인 영역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고, 두렵다.


그러니 에픽하이는 신보에서 위로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구원과 긍정의 단어는 없다. 오히려 결핍을 전시함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 무대 앞뒤 자아의 괴리를 논하며 체념하는 ‘수상소감’, 펜데믹 시대의 고립감과 비관을 연결한 ‘Social Distance 16', 김사월의 목소리에 무기력을 실어 보낸 ’Leica' 등이 그렇다.


미니멀한 일렉트로니카 사운드의 ‘True Crime'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다. 투컷이 만든 피아노 루프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타블로와 미쓰라는 세상과 불화를 겪는 사랑들을 지지한다. 구체적으로 대상을 거명하지 않았으나, 이 가사를 듣고 누가 위로받을 수 있는지는 자명하다.


“사랑을 등진 세상이 세상을 등진 사랑을 어찌 이해하리

몸 사리는 거짓 순결보다 우리가 온몸으로 쓴 외설이

내겐 시 한마디“

- ‘True Crime(에픽하이) 중



더블 타이틀곡 ‘내 얘기 같아’는 에픽하이가 ‘연애소설’ 등 근작에서 내세웠던 ‘보편적 사랑 노래’의 계보를 잇는 동시에, 확산된 우울감을 다뤘다. 의도적으로 드럼을 배제하고 영화 음악과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스트링 사운드 위에 얹혀지는 헤이즈의 목소리, 고상지의 반도네온은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만,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에서는 유독 이질적인 편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침잠의 정서가 앨범을 지배하고 있지만, 에픽하이는 맹렬한 힙합의 태도 역시 챙겼다. 라틴 트랩 스타일의 타이틀곡 ‘Rosario'이 대표적이다. 헤이터(Hater)들에게 중지 손가락을 추켜 올리는 한편, 자신있게 전설을 자처하며 브라가도시오(Braggadocio)를 드러낸다. ’Born Hater'와 ‘노땡큐’의 태도를 계승하는 ‘정당방위’ 역시 마찬가지다. 코드쿤스트의 변칙적인 비트 위에서 에픽하이는 우원재와 창모, 넉살 등 다음 세대의 테크니션들과 함께 한껏 건들거린다. 타블로의 새로운 플로우는 물론, 미쓰라가 더욱 타격감 있는 랩을 들려준다는 것도 반갑다. < 신발장 >(2014) 당시 미쓰라를 괴롭혔던 슬럼프는 옛일이 되었다.


< EPIK HIGH IS HERE >는 그들의  파란만장한 18년을 기념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이 앨범은 그들의 커리어에서 번뜩이는 진보성을 갖춘 작품은 아니다. <We've done something wonderful>(2017) 등, 최근 에픽하이의 행보를 좇아 온 이들에게는 기시감이 드는 순간이 많이 있다. 


음악적 형식은 새롭지 않으나, 이들의 언어가 만드는 ‘서사적인 높음’은 퇴색되지 않았다. 앨범의 극후반을 장식하는 ‘End Of The World'에서 타블로는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내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에픽하이는 여기에 있다.' 화자의 밤이 청자의 밤으로 중첩되는 순간이다. 파트 下가 발표되었을 때, < EPIK HIGH IS HERE >이라는 작품이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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