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1월 21일, 팝스타 레이디 가가는 감격에 찬 얼굴로 국가를 불렀다. '공화당원' 컨트리 가수 가스 브룩스 역시 'Amazing Grace'를 불렀고, 취임식 이후에도 톰 행크스의 진행과 함께, 쟁쟁한 뮤지션들이 '화합'에 대한 기대를 노래하며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것은 바이든이라는 인물 그 자체에 대한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최악의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안도감의 발로다.
트럼프의 집권기는 분열과 반지성이 고개를 든 시기였다. 시대가 만든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트럼프의 집권기 동안, 리버럴의 시각에서 보수 진영의 인물들을 그린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다. 크리스찬 베일이 '네오콘'의 수장 딕 체니 전 부통령을 재현한 영화 < 바이스 >(애덤 맥케이 연출), 성평등 헌법 수정안(ERA)의 부결을 이끈 필리스 슐래플리와 페미니스트들의 갈등을 그린 TV 시리즈 < 미세스 아메리카 >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작품을 더 이야기해야 한다면 보수 진영의 대표적인 스피커 '폭스 뉴스'를 세운 로저 에일스(1940 ~ 2017)의 이야기 < 라우디스트 보이스 >가 거론되어야 하겠다 .'왓챠'를 통해 독점 공개된 이 작품에서, 배우 러셀 크로우는 절륜한 연기로 로저 에일스의 영광과 몰락을 재현했다. 그는 체중을 크게 늘리는 것은 물론, 과장법 없이 로저 에일스의 다면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열연을 펼친다. <글래디에이터>의 영웅 '막시무스'를 떠올릴 겨를이 없다.
로저 에일스는 리처드 닉슨과 조지 H.W 부시 등의 선거 캠프에서 미디어 파트를 맡으며 공화당 대통령의 탄생에 공헌한 '킹 메이커'이며, NBC에서 높은 신뢰를 받았던 언론인이었다. '뉴스 코퍼레이션'의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은 로저 에일스를 불러, 24시간 동안 보수 뉴스를 송출하는 채널을 만드는 데 합의한다.
폭스 뉴스의 슬로건은 "공정하고 균형있게", "우리는 보도하고 당신은 결정한다"다. 극도의 편향성을 드러내는 폭스의 보도 방식을 보았을 때 이 슬로건은 몹시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맞는 말이기도 하다. 'CNN 등 좌파 일색의 언론 지형에서 우리가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폭스 뉴스와 로저 에일스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로저 에일스는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를 내면화했고, 그것을 애써 숨기지 않은 인물이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만드는 데에 능했다. 그의 프로파간다는 주도면밀하게 백인 보수주의자를 겨냥했다. 백인, 자본주의, 기독교 복음, 애국을 '미국적 가치'로 여기고 숭상했지만, 동시에 이 가치를 철저히 이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등, 96년 이후 미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들마다 폭스 뉴스가 있었다. 그의 저널리즘은 언제나 정치 세력과 영합하는 것이었다. 9.11 테러 당시 빌딩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실어 보냈고, 오바마에게는 '무슬림'과 '사회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웠던 것이 대표적이다. '선은 겁쟁이나 지킨다'고 말하는 그에게 진실과 보도 윤리는 우선 순위에 없었다
극 중반부, 로저 에일스가 집 앞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성조기를 땅에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실수로 성조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장면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이 작품은 로저 에일스가 미국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노라 주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창업군주의 초라한 몰락
이 보수 제국의 창업군주를 몰락시킨 것은, 성범죄 폭로였다. 로저 에일스는 저널리스트 그레천 칼슨(나오미 왓츠 분), 로리 룬(애나벨 윌리스 분) 등 폭스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해왔다. 그는 신체적으로 학대하는 것은 물론, 가스라이팅과 언어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로저 에일스는 자신의 혐의를 줄곧 부인했으나, 그레천 칼슨이 1년 동안 준비한 녹취록에 반박을 내놓지 못했다. 당시 그레천 칼슨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기를 원했고, 칼슨의 폭로는 이후 미투(#METOO)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성범죄를 다루는 사람들의 상반된 태도 역시 이 작품에서 놓치지 않았던 요소다. 로저 에일스와 전략적 협력 관계에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는 '로저는 좋은 사람'이라면서 두둔하는 한편, '그와 좋은 관계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끔찍한 범죄를 당했을 수 있겠느냐'며 전형적인 2차 가해를 저지른다. 이 사건은 샤를리즈 테론과 마고 로비,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밤쉘 : 세상을 바꾼 폭탄 선언>에도 그려져 있다. <밤쉘>이 여성의 승리 서사에 집중했다면,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그 반대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로저 에일스는 폭스뉴스 CEO에서 물러난 지 10개월이 지난 2017년 5월, 혈우병으로 인한 경막하혈종으로 사망한다. <라우디스트 보이스>는 로저 에일스가 숨을 거둔 장면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말은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성폭력에 대한 폭로 이후 CEO 자리에서 쫓겨난 로저 에일스는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모습을 흐뭇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것이 <라우디스트 보이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로저 에일스는 자신이 세운 보수의 제국에서 초라하게 축출당했으나, 그가 만든 제국은 그의 사후에도 건재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