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 되기 위한 이재명의 고군분투 이야기
가장 어두운 땅 속에 심어놓은 희망의 씨앗은 어느덧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두터운 땅을 뚫고 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두 가지 문제와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먼저 공부할 분량이었습니다. 대입 검정고시는 7과목 뿐이었지만 예비고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14과목이나 공부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곱절로 필요했지요.
다음은 등록금이었습니다. '주간 대학에 갈 돈이 어디서 나겠느냐'는 형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대학을 꼭 가야겠다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야간 전문대를 가라던 아버지 말씀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지요. 그렇게 답이 없는 문제를 끌어안은 채 한 동안은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과 이듬해의 5·18 민주항쟁으로 온 나라가 혼란과 슬픔에 잠겼을 즈음이었습니다. 갑자기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입시가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대입 본고사가 폐지되고 대학생 과외가 전면 금지 됐습니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군사정권 치하라 숨죽이고 따르는 분위기였습니다.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대학에 가면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와 생활비를 버는 것이 내가 강구한 유일한 대책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닥 희망이 꺼지고 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되는 교육개혁 조치로 인해 나는 조금 엉뚱한 전화위복을 맞았습니다.
첫 번째,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주관식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시험이라고는 검정고시만 쳐 본 나는 한 번도 주관식 시험을 치러본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본고사를 봤다면 얕은 밑천이 드러나 절대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학 시절에도 주관식 문제 때문에 고생을 해봤기에 잘 알지요.
두 번째, 검정고시란 점이 오히려 좋은 내신 성적을 받기 수월하게 됐습니다. 입시에 내신 성적이 30-50% 정도 반영되는데, 검정고시 출신자들은 내신 성적이 없으므로 예비고사 점수에 따라 내신 등급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비고사만 잘 보면 되는 것이었죠. 후에 내신 성적이 안 좋으면 일부러 학교를 그만 두고 검정고시를 보는 현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장학금 제도가 대폭 늘었습니다. 과외금지 조치 이후 대학생들이 과외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장학금 제도는 우수한 학생들을 유인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죠. 덕분에 장학금 제도가 잘 마련된 학교를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였습니다.
장학금 지불되는 곳으로 입학해야겠다. 아버지에게 지금도 미안한데 60~70만원씩 타가려면 여간 힘들지 않을 것이다.
1981-03-02
1982년도 학력고사에서 내가 받아든 성적은 285점이었습니다. 그해 난이도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점수였습니다. 서울대 법대 예상 커트라인이 꼭 285점까지였으니까요. 나는 딱 한 군데 대학에만 원서를 냈습니다. 등록금 면제에 매월 학비 보조금 20만원 지원이라는 훌륭한 장학 제도를 갖춘 학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합격이었습니다. 지난한 과정 끝에 원하던 것을 성취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자랑스러웠습니다. 조금 으쓱하기도 했습니다.
소문은 퍼져 어디 아는 사람만 만나면 축하의 인사를 들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번 여름에 고향에라도 가게 되면 어깨를 펴고 다니게 될 것이다.
1982-02-17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가파른 상대원 고갯길을 오르던 순간들이 생각납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페달을 밟다보니 우연이 기회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기적처럼 대학생이 됐습니다.
10화 <나의 첫 번째 자전거>에서는 자전거를 친구 삼아 다니며 시야를 넓혔던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