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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r 22. 2018

씨앗은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운다

깊은 절망 속에서 탈출한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08화│씨앗은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운다│©안다연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어떤 계절이 있을 겁니다. 굳이 낡은 일기장을 꺼내 들추지 않아도 말입니다. 나에겐 1980년 늦봄부터 여름까지가 그러합니다.


1980-05-18│이재명의 일기


1980년 5월 18일,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습니다. 누군가 나라를 도둑질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도둑인지 분간하기에는 너무 어리석은 때였지만 말입니다. 그날 저녁 권투경기 중계가 있었습니다. WBC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5차 방어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해온 챔피언 박찬희 선수와 일본의 도전자 오쿠마 쇼지의 경기였습니다. 통쾌한 승부를 기대했지만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무기력하던 박찬희 선수는 9회 초에 KO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은 도둑놈 같았고, 경기는 엉터리 같았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삶도 엉터리었습니다. 공부를 점점 멀리하게 됐고, 마음은 점점 싱숭생숭했고, 나의 팔은... 통증이 날로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른 새벽마다 시장 청소일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재촉에 잠을 깼습니다. 몸도 성치 않고 미래도 불투명했던 나는 이런 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와 위로를 건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헛된 바람일 뿐이었습니다.


왜, 왜, 왜, 내가 아버질 피해야 하는가? 원수도 아니다. 적도 아니다. 아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구란 아버지가 아닌가. 하지만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1980-07-06


어디든 다시 취직하길 바라시는 아버지의 등쌀에 못이겨 입사 서류를 내러갔다 그냥 돌아온 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서류는 제출했지만 탈락했다고 말입니다. 오직 공부에 전념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시간을 벌어 공부하고 싶은 마음과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내 마음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였습니다.


1980-06-03│이재명의 일기

 



불안한 미래가 막막했고, 대화가 단절된 가족들이 답답했습니다. 그렇게 나의 일기장에는 '죽고 싶다'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수없이 많아졌습니다. 어느날은 이렇게 사느니 깨끗이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또 어느날은 그러기에는 내 청춘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집에 와 누워서 생각하니 18세의 나이에 자살한다는 건 미친 짓일 것 같았다.
1980-05-11



어리고 여렸던 소년의 자살기도는 불쑥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쓰레기 치우러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는 아버지를 괜히 따라 나섰다가 크게 혼이 났던 날이었습니다. 서러움과 절망감에 연탄불을 들여놓고 그 옆에 누워 수면제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는 멀쩡히 깨어나고 말았습니다. 안도감과 절망감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두번째 자살기도는 억지로 오리엔트 공장에 재입사 서류를 낸 후였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면접일 전까지 죽어버리는 게 목표가 되어버릴 만큼 너무도 간절하게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온 식구가 모여 사는 좁은 집에서는 자살도 쉽지 않았습니다. 집에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좀처럼 오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면접일 오전까지도 나의 생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시자마자 연탄을 한 장 사왔습니다. 방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조급해진 나는 다락으로 기어올라갔습니다. 전처럼 연탄불을 피우고 수면제를 삼키고 누워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그때 매형이 들어왔습니다. 나의 두번째 자살기도 역시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우습게도 나는 자살기도를 매형에게 들킨 것보다 면접에 안 간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는 것이 더욱 두려웠습니다. 이미 약속된 면접시간은 지나버렸으나 나는 면접을 보러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괴롭고 지루한 삶을 어떻게 다시 살아가나'와 '이왕 목숨 부지하게 된 거, 열심히 살아봐야 하나'라는 두 가지 생각을 발끝으로 툭툭 걷어차며 한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뗐습니다.


죽음도 이렇게 어려운가. 죽었으면 편할 것을. 이 일은 매형만이 알 것이다. 차라리 집안 식구가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1980-07-11




1980-07-26│이재명의 일기


그날 이후로 내 일기장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나의 진짜 속마음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였음을 두 차례의 어리석은 시도 끝에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승길만 못하다고 여겼던 오리엔트 공장에 재입사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공부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의 나락 끝에 선 순간, 새로운 삶이 주어졌습니다. 마치 씨앗이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싹을 틔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9화  <대학생 되기 프로젝트>에서는 불가능으로만 여겼던 '대입'을 실현해낸 소년공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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