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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r 15. 2018

차렷을 못하는 건 내 탓이야

굽은 팔을 가려야 했던 소년공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07화│차렷을 못하는 건 내 탓이야│©안다연




나는 팔을 다친 후로 반소매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푹푹 찌는 여름날에도 긴소매만 입었습니다. 굽은 팔을 내보이는 것보다 더위를 이겨내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입니다. 차렷 자세를 취해야 하는 기념 사진을 찍을 때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모두가 반듯한 차렷을 하고 있을 때 제 굽은 팔이 더 도드라져 보였으니까요.


차렷 자세로 기념 사진을 찍을 때면 영락없이 드러나는 이재명의 굽은 팔


그때도 노동법에는 산업재해에 대한 보상 조항이 있었지만 내 곁에는 노동법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우린 그저 기계보다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1980-07-29│이재명의 일기


처음 프레스에 팔을 눌리는 사고를 당했을 땐 오히려 다행이라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프레스를 돌리다가 손가락 몇 개가 잘려나가는 형들의 모습을 본 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감기처럼,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치유될 것이라고만 여겼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사고로부터 일 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성장기에 들어선 내 몸은 자라기 시작했지만 함께 자라야 할 제 팔의 뼈만은 1년 전 그대로였습니다. 성장판이 고장난 팔은 비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아프니 점점 악화되는 모양이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1980-06-18


제 멋대로 굽어진 팔이 안겨다주는 통증은 극심했습니다. 병원에선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안다고 했지만 비싼 비용 탓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형의 직장 의료보험 카드를 빌려 진료를 보려고도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지역 제한 때문에 사용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몹시도 불던 날이었습니다.


1980-01-30│이재명의 일기




열일곱 살의 나는 장애를 안고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과 생전 처음 겪는 극심한 통증에 하루하루가 지옥같았습니다. 사고를 겪은 공장은 이미 폐업을 한 상태라 보상을 받을 곳도, 하소연해볼 곳도 없었습니다. 내게 허락된 유일한 방법은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아서 다치게 됐다며, 차렷을 못하게 된 것도 내 탓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마음씨 따뜻한 매형은 이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내가 팔 고쳐줄 테니 실망하지 말라’며 위로해주었습니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매형이 정말로 내 팔을 고쳐줄 수는 없겠지만 말만으로도 참 고마웠습니다. 


1980-07-03│이재명의 일기




굽은 팔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대로라면 군대를 가지 못 할 것이 뻔했고, 행여나 사회에서 차별을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나 같은 팔 병신은 군역이 면제될 텐데 정말 그렇게 되면 난 어떻게 한단 말이냐. 
1980-09-02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내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간절한 갈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매달린 것이 공부였습니다. 스스로의 나태함을 꾸짖으며 공부했습니다.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책상에 압정을 둬가며 공부한 끝에 고입,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생활비 지원까지 받는 장학생으로 법대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손목뼈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방치했다가 굽어버린 팔이 결국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내 굽은 팔은 소년공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자 공부에 매달리도록 했고, 법을 공부해 노동자를 위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시절의 일기장을 통해 세상과 이야기하도록 했습니다.





저서 <이재명의 굽은 팔> 출판기념회에서 팔을 내보이고 있는 이재명


비록 내 팔은 굽었지만, 세상이 또 다른 굽은 팔을 만들지 않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굽은 세상을 곧게 펴고 싶었습니다. 나의 왼팔은 지금도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굽은 세상을 펼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열심히 성실히 살리라.
1987-07-14


1987-07-04│사법연수원에서 쓴 이재명의 일기




8화  <씨앗은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운다>에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깊은 절망을 극복한 소년공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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