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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r 01. 2018

이름 없는 공장, 이름 없는 공돌이

남의 이름으로 공장을 전전해야만 했던 소년공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05화│이름 없는 공장, 이름 없는 공돌이│©안다연



나이가 너무 어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일해야 했던, 그래서 아무도 될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출근했던 목걸이 공장도 저처럼 이름이 없었습니다.


갓 국민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사리 손으로 염산을 다루고 불 위에서 끓어오르는 납의 증기를 들이마시며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습니다. 품삯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사장은 석 달 치 월급을 주지 않은 채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이름이 없던 나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1980-01-08│이재명의 일기


두 번째 공장은 '동마고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름이 있는 공장에 다니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나도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빌려온 동네 형의 이름, 박승원이라는 이름입니다. 이곳에서 벨트 속으로 손가락이 말려 들어가는 첫 번째 사고를 겪었습니다. 회사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고, 나는 손을 치료하는 동안 치료비는 물론 월급도 한 푼 받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공장은 '아주냉동'이었습니다. 냉장고를 만드는 이곳에서는 함석을 가위로 잘라야했는데, 그 날카로운 절단면 때문에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곤 했습니다. 규모가 꽤 큰 회사라 직원들도 많았는데 야간에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아버지의 대답을 듣곤 건넌방으로 건너가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네 번째 공장은 야구 글러브와 스키 장갑을 만드는 '대양실업'입니다. 나름의 손재주를 인정받아 기능공으로 일하게 됐지요. 야구 글러브 용 가죽을 재단하는 일이었는데, 손으로 가죽을 기계에 밀어 넣고 발로 페달을 밟으면서 손을 잽싸게 빼면 칼날이 박혀 있는 프레스가 떨어지며 순식간에 가죽이 잘립니다. 이때 까딱 실수하면 사고가 날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그 사고가 나에게 닥쳤습니다. 손목이 프레스에 눌린 것입니다.


그저 타박상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누구 하나 병원 가보란 소리를 하지 않아 달리 치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때 병원에라도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말입니다. 이때 부러진 손목 뼈가 결국 내 인생을 바꾸어놓게 됩니다.     


굳이 고등공민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하면 졸업 자격을 얻는다는 사실을 그때쯤 알게 됐습니다. 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내겐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제 때 학원에 가려면 30분 일찍 퇴근을 해야 했는데 당연히 회사에서 사정을 봐주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게 무슨 우연인지, 얼마 후 회사 근무시간이 조정되면서 퇴근이 30분 앞당겨졌습니다. 그렇게 학원이라는 곳에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3개월 후, 나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이재명의 고입 검정고시 성적증명서



열일곱 살, 이번에는 시계를 만드는 오리엔트 공장에 다니게 됐습니다. 몇 가지 이름을 거쳐, 오리엔트에서 얻게 된 내 이름은 영웅이었습니다. 반복해서 남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는 것은 어린 소년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내 이름을 찾기 위해서 나는 더 공부가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는 곳이 시험지뿐이었으니까요.

 

오리엔트 공장 시절, 동료 형님들과 야유회 갔던 날

    

남은 시험은 대입 검정고시... 또 1년을 치열하게 공부해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6년이 걸려야 하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고입 검정고시 3개월, 대입 검정고시 1년... 1년 3개월로 단축했습니다. 목표한 대로 뜻을 이루고나자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꿈에 불과했습니다. 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들볶이다 못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큰 소리 떵떵 치고 떠난 오리엔트 공장으로 돌아가야만 했거든요. 그때가 나의 마지막 소년공 시절입니다. 나는 그제 서야 비로소 ‘이재명’이란 내 이름으로 공장에 다니게 됐습니다.


1980년대 오리엔트 공장 전경


요즘은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힌다. 회사에서 몇 번씩이나 옥상에 올라가서 바람 쐬고 왔다.
1980-01-08

이름 없는 소년공으로 시작한 6년의 공장생활 끝에 내 이름을 찾았습니다. 국졸이었던 학력은 고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나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평생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정당한 대우도 받지 못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그곳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내일이 오늘보다는 나을 거라는 희망이 가까스로 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0-08-20 │이재명의 일기


그렇다고 대학교 가는 것도 어렵다. 자! 그러니 어찌해야 하는가를 재명아 결정해라. 아니, 어렵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한 번 해볼까?
1980-08-20




6화  <어머니와 누이들>에서는 이재명과 함께 웃고 울었던 어머니, 누나, 그리고 여동생에 대한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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