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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Feb 22. 2018

교복을 입고 싶었다, 교복을 갖고 싶었다

교복을 입지 못해 서러웠던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04화│교복을 입고 싶었다, 교복을 갖고 싶었다│©안다연



흔히들 교복 입고 친구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학창시절을 추억합니다. 그러나 나의 청소년기는 교복을 입지 못한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고, 교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버스에서 새하얀 옷깃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마주칠 때면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습니다.  


헌인능에 소풍갔다 오는 중학생 아이들과 마주쳤다. 나는 교복 하나 입어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 입을 것이다. 생각하면 내 신세도 한심하다.
1980-05-03



이러한 박탈감은 대입 검정고시 공부를 위해 오리엔트 공장을 그만 두었던 1980년 봄에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좋은 성적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의 자격을 갖췄지만,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아무 소속도 없는 백수에 불과했습니다.


백수 아들이 집구석에서 노는 꼴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나에게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노느니 아버지 일을 돕는 게 당연한데, 열일곱 살의 나는 그것이 너무도 창피했습니다. 한동안은 아버지가 일부러 나를 망신주려 한다고 오해하기도 했지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부터 청소를 하다가 알고 지내던 여학생을 마주친 날이 있었습니다. 새벽녘 가로등 불빛 아래 교복 입은 모습이 썩 잘 어울렸던 그 학생의 이름은 귀녀입니다. 작업복 차림으로 폐지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은 귀녀 앞이라 그런지 더욱 초라하게만 느껴졌습니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봐야만 했습니다.

      

“다른 때 만났으면 내 합격 이야기, 걔가 다니는 학교 이야기도 할 텐데 아무 이야기도 못했다. 그때가 5시 좀 넘었다. 언제 또 다시 만났으면...
1980-05-24

1980-05-24│이재명의 일기


그날 겪었던 안타까움과 창피함 때문이었을까요? 어느 날은 괜시리 슬퍼져서 집밖으로 뛰쳐나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내일 아침 꼭 귀녀를 만나러 가야겠다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새벽 4시 반에 깨워달라고 엄마에게 부탁을 했지만, 다음날 새벽이 되자 모든 게 귀찮아져 그냥 자버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변덕인지... 열일곱 살의 나는 그날 이런 일기를 남겼습니다.


오늘 내가 우는 것은 사춘기 과도적 시기의 감정만은 아니다.
1980-06-04
1980-06-04│이재명의 일기




교복 없는 청소년의 설움은 반복됐습니다. 학생증 대신 학원 수강증을 보여주며 버스를 타자 차장이 학생 할인을 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교복 입어야만 학생이냐"며 대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1-03-24│이재명의 일기


이런 처량한 신세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은들 작심삼일이었습니다. 절망 끝에 치밀하게 자살을 기도한 적도 두 번 있습니다. 피워 둔 연탄불이 어이 없이 꺼져 버렸고, 약국에서 산 수면제가 알고 보니 소화제였던 탓에 나는 얄궂은 생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치열한 고민 끝에 대학에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야간대학이나 전문대학이 아닌 4년제 주간대학에 가기로 마음 먹고 죽기살기로 공부했습니다. 중고등학교에 다녀보지도 못한 채 대학에 들어가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만, 마침내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게 됐습니다. 학비뿐만 아니라 한 달에 20만원의 생활비까지 지원받는 장학생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서울 한복판 종로2가에 가서 대학교 교복을 맞췄습니다. 내 평생 처음으로 갖게 된 교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처음 입어보는 교복 차림은 몹시 쑥스러웠습니다. 아무도 대학교 교복을 입지 않는 시대, 어울리지 않는 교복 차림 때문에 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만 쳐다보는 듯 느껴지기도 했지요.

 

집에 와서 교복을 입어보니 이수일이 같아서 이상했다.
1982-02-18


중앙대학교 입학식│대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이재명과 어머니


너무나도 가슴 벅찼던 대학 입학식, 어머니와 찍은 사진 속의 나는 대학교 교복을 입고 있습니다. 쉰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날의 사진을 보면 뭉클함이 차오르곤 합니다. 그만큼 교복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진심으로 교복을 입고 싶었고, 교복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있는 나는 요즘도 비싼 교복 값에 휘청이는 청소년과 학부모에게 유난히 마음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마음,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5화  <이름 없는 공장, 이름 없는 공돌이>에서는 나이가 어려 남의 이름을 빌려가며 여러 공장을 전전해야 했던 소년공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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