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마음의 고향, 안동 청량산 이야기
나의 고향은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에 있는 지통마을입니다. 청량산 자락에 있는 지통마을은 행정구역 상 안동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경상북도의 오지라고 알려져 있는 봉화에 더 가깝습니다. 이곳은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안이 살아온 곳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이곳에서 5남 4녀를 낳으셨지만, 누나 둘은 어려서 세상을 떴기에 우리 남매들은 5남 2녀로 성장하였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홀연히 집을 떠났습니다. 두 형과 누나도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기에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어린 아이 넷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척박한 산골에서 어머니 혼자 네 아이를 키우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 집 저 집 동정을 받아가며 3년을 살았습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우리 식구들은 얼떨결에 고향을 떠나 성남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나의 가슴 속에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향! 이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감정의 샘터인 것 같다.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이다.
1980-07-14
나는 항상 고향을 생각하면서 어린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보리밥에 새카만 된장이 끼니의 전부였습니다. 도시락 안에는 식어빠져서 숟가락도 잘 들어가지 않는 시커먼 보리밥과 짠지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신이 났습니다. 엄마를 부르며 집을 향해 달릴 때면 등에 맨 빈 도시락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냈지요.
뒷산과 앞산에서 콩밭, 고추밭을 매고 계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언제나 햇볕에 그을려 어두웠습니다. 하지만 딸각거리는 도시락 소리와 함께 숨차게 달려오는 나를 발견할 때면,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로 웃어주셨습니다. 그 웃음은 마치 내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우리 땅이 없었기에, 어머니께서는 남의 집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남의 집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요일이나 방학이면 나도 어머니를 돕겠다며 호미를 들고 나섰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뒷산에 가서 콩밭도 매고 고추밭도 맸습니다. 잡초들은 어찌나 잘 자라던지요. 하루라도 매지 않으면 콩밭, 고추밭을 덮어버릴 것처럼 왕성하게 자라나는 잡풀들을 뽑아내고, 호미로 흙을 부드럽게 해주는 것이 김을 매는 일입니다.
한번 김매기를 시작하면 어머니와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올 쯤 어머니께서 허리를 펴고 일어서시며 ‘재명아. 밥묵고 하자’ 하면 그 목소리가 어찌나 반가웠던지요.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어머니와 나눠먹던 식은 보리밥은 어찌나 맛이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어머니와 함께였기에 더 그랬을 겁니다.
성남으로 이사와 온 식구가 밥벌이에 나선 덕에 그나마 가끔씩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는 일이 생겼지만,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먹었던 보리밥의 맛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보리밥에는 청량산의 맑은 공기와 새소리, 물소리, 그리고 내 어머니와 단 둘이 보냈던 추억이 담겨 있는 까닭이겠지요.
나도 엄마를 돕겠다고 호미 들고 엄마 따라 뒷산에 가서 콩밭도 매었다. 밭 매고 먹는 보리밥 맛이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1980-07-14
어려운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를 다니는 것 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남은 네 남매 입에 풀칠하는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크레파스니 물감이니 하는 준비물을 가져가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미술 시간이 되어 친구들이 교실 밖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면 나는 알아서 혼자 교실에 남아 청소를 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6학년 담임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표하는 사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반 학생들이 돈을 각출해 간식을 준비했습니다. 물론 나는 돈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돈을 내지 못한 몇 아이들은 사은회 시간 내내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몇 번이나 먹으라고 했지만 먹지 않습니다. 돈을 낸 아이들의 시선 때문인지, 내 자존심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먹고 싶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깨물어 먹는 자두의 새콤달콤한 향에 저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습니다. 침 넘기는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염려되어 조심조심 침을 삼켰습니다. 끝내 우리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우리는 간신히 억제하던 욕망을 해제해 버리고서는 선생님 몫으로 남겨놓은 과일들을 게 눈 감추 듯 전부 먹어버렸습니다.
결코 완전범죄가 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선생님한테 그 장면을 들켜버린 우리는 엎드려 뻗쳐 자세로 엉덩이를 여러 대 맞았습니다. 선생님은 ‘먹으랄 땐 안 먹고 왜 훔쳐 먹느냐’며 혼을 내시더니 잠깐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돌아온 선생님 손에는 500원 어치 과일이 들려 있었습니다. 우리들 몫의 과일을 사오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다른 친구들 앞에서 먹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허기 앞에 자존심을 내려 놓은 우리들 마음을 헤아려 주신 거죠. 나는 선생님이 더 사다주신 과일을 도무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먹지 못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육성회비 조차 못내던 내가 수학여행을 다녀온 것도 선생님들 덕분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은 당연히 돈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지레 못 간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집으로 찾아오셔서 몇 시간이나 저를 설득하셨지요.
교장 선생님의 덕도 컸습니다. 교문 앞의 밭에서 돌을 골라내거나 보리를 베는 등 학교 안팎의 궂은 일을 하면 조금씩 품삯을 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돈을 모아서 수학여행비를 마련했습니다. 수학여행에 가느라고 난생 처음 운동화라는 걸 가져 봤습니다. 아끼고 또 아끼고 몰래 숨겨 놓고서만 신곤 했는데, 왜 이 운동화는 그리도 빨리 닳아버리는 걸까요?
준비물이 없어 수업에 참여 못하고, 낼 돈이 없어 간식을 나눠 먹지 못하고, 수학여행은 지레 포기하는 것이 당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들... 이것이 나를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리게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어봤다. 신발이 닳을까봐 구석에 몰래 숨겨놓고 신었다. 그 신발이 왜 그리 빨리 떨어지는지...
1980-01-08
가난과 그리움은 비례하는 것일까요? 고향을 떠올리면 가난에서 비롯된 기억들만 떠오릅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올리면 무한한 그리움도 함께 찾아옵니다. 나에게 고향은 어머니와 선생님,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국민학교를 무사히 마칠 때까지 궂은 일도 마다 않으신 어머니의 마음, 엄하게 야단친 뒤에 따로 과일을 사 먹이고 집에까지 찾아와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게 해주신 선생님의 마음이 떠오르는 곳이 바로 나의 고향입니다.
떠나온 시간이 길어진 만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지나 봅니다. 대학시절 어느 날, 영어 수업 시간에 MBC 뉴스에서 촬영을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방송에 얼굴을 비추면 혹시라도 고향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고 기별이 올까 하여 목을 빼고 있었지요. 창피함을 무릅 쓰게 할 만큼, 고향 친구들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고향 친구들이 내 모습을 보았을까, 궁금해집니다.
3화 <서울 옆에 '성남이라는 곳'으로 와라>에서는 안동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성남으로 이주하게 된 소년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