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재명이 성남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 음력 2월 29일, 우리 가족은 성남이라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저 서울 옆 어딘가에 있다는 것 말고는 성남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족을 떠났던 아버지로부터 몇 년만에 성남이라는 곳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던 것 뿐입니다. 한동안 방황하던 아버지는 성남에서 식구들과 함께 힘 모아 살아보자는 생각을 갖고 계셨나 봅니다. 나는 친구들과 달리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고향 친구들을 떠나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향 안동을 떠나는 날, 비가 한 없이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이사 가는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은 아마도 처량한 신세를 위로하기 위해 생겨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날 나는 눈이 아파서 안대를 차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앞이 깜깜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삿짐을 메고 든 채로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역에 왔습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또 고갯길을 오르고 올라 성남 상대원동에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비는 봄 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상대원동은 고향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대규모의 공단이 들어서 있었으며 회색 작업복을 입는 사람들이 많이들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타향에 나와서 고향보다는 잘 살아야지 못 산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한 번 잘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1980-06-10
우리 식구들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희망을 갖고 상대원동 어느 바닥에 삶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아버지는 상대원 시장 청소부로 일했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시장 변소에서 이용료를 받는 일을 했고, 나는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아버지는 청소를 하면서 폐지와 고물도 주웠습니다. 시멘트 포대를 주워다 실밥을 푼 뒤 봉투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고, 폐지와 깡통은 고물상에 팔았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쓰레기 장사라고 불렀습니다.
쓰레기 장사 아버지는 우리에게 썩은 과일을 주워다가 먹였고, 삼국지 같은 책을 주워다 읽혔습니다. 영어공부 하라며 카세트 레코더도 주워 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오랜 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셀 수 없이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뜻대로 온 가족이 돈 벌이에 나선 덕에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습니다. 성남살이 4년 만에 비로소 월셋방에서 탈출해 200만 원 짜리 전셋집으로 옮긴 것입니다. 너무 헌 집이라 집안이 쓰레기투성이인데다가 썩은 쥐의 뼈가 남아있는 것이 문제였지만요.
어쨌든 이사를 왔으니 깨끗이 쓸고 닦고 하면 그런대로 살 만할 것 같다.
1980-08-31
그 와중에도 우리는 살만한 집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우리 가족의 첫 전셋집은 겨울이 되자 살 수가 없을 정도로 추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결국 우리는 한 겨울에 또 한 번 거처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삶에 들이닥친 문제 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흙수저도 못 되는 무수저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좌절을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깡으로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자전거 페달을 밟아 가파른 상대원 고갯길을 오르듯 하다보면, 극한의 고통 끝에 새로운 길이 희미하게나마 빼꼼 열리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고개를 넘고 나면 또 다른 고갯길의 연속입니다. 밀려오는 좌절감을 뒤로한 채 다시 페달을 밟는 것 외에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성남에서 쓰인 나의 일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고 또 오르던 험한 시절에 대한 기록입니다. 소심한 성격에 외롭고 고독했던 그때의 나에게 일기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셈입니다. 일기 속 수많은 기억들로 아로새겨진 성남은 나에게 두 번째 고향입니다.
4화 <교복을 입고 싶었다, 교복을 갖고 싶었다>에서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년공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