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통해 성찰하고 성장하는 이재명의 이야기
철없던 지난날의 일기장을 다시금 들여다보면 얼굴이 화끈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슨 연유로 이리도 한 치의 여과 없이 자기 고백을 남기고 말았는지 읽을 때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서 내심 뿌듯함과 대견함을 느끼는 순간도 아주 간혹은 찾아옵니다. 열여섯 살의 겨울과 스물여섯 살의 봄, 그 10년의 간극 속에서 미성숙했던 한 소년이 마치 손톱 마냥 더디게나마 꾸준히 자라고 있음을 발견해낼 때가 그러합니다.
공장 시절의 나는 참 이기적이고 방어적이며 1차원적인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저 공장을 벗어나 남들처럼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더는 무시당하거나 구타당하지 않기 위해 높은 학력을 취하는 것이 내가 지닌 바람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38년 전, 1980년 대한민국의 봄은 군부독재의 혹독한 피바람으로 인해 비릿하고 쓰기만 한 계절이었습니다. 그때도 나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저 막연한 불만으로 가득한 치기 어린 십대 소년이었습니다.
고백하건대 나는 미디어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5.18을 내 멋대로 재단해버리기도 했습니다. 군사정권에 불만이 많았던지라 처음엔 광주에서 큰 데모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습니다. 결국엔 텔레비전과 신문 속 반복되는 이야기에 길들여져 숭고한 광주시민들을 극렬분자 내지는 폭도로 여기게 됐습니다. 가끔 미심쩍게 느껴지는 뉴스를 접한다 한들,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면 그뿐이었습니다.
아침에 뉴스 나오는데 정당은 해산하고, 국회는 국보위가 대행한다나? 이런 제길. 순 제 마음대로들이야. 하기야 나완 별로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1980-09-25
그 미시적인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히게 된 때는 대학교에 들어가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대학 내내 졸업하기 전에 사법고시 합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2차 시험에서 그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방황은 무던히도 길었고, 또 깊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힘으로 무엇이든 돌파해내리라 믿었던, 그리고 그 믿음이 부서져 좌절했던 나를 추스른 건 다름 아닌 가족과 친구들의 위로였습니다. 나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다시 힘을 내 사법고시 재도전을 결심하게 된 날, 나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일기장의 성격을 좀 바꾸어서 나 자신의 결심과 행위에 대한 단순한 기록과 평가를 지나서 좀 더 넓게 가족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서도 약간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겠다. 나는 세계의 일부이며 세계는 나의 일부임을 명심하고 살 것이다.
1985-10-18
이날 이후, 나의 일기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공부하기 싫다는 푸념과 연애도 못하는 신세 한탄이 하루걸러 등장하던 일기는 돌연 엄숙해졌습니다. 때로는 비장하기까지 했습니다. 미래에 이리도 쑥스러울 줄 모르고, 한동안은 마치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이름 모를 님에게 띄우는 편지글 형식의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독재타도 시위에 참여했던 날, 나는 님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제는 학교 수업하고 국제법은 결강하면서 님을 위한 행진에 참가했었습니다. 매운 개스가 나르는 최루탄 파편이 약간은 무섭고 또한 4학년이나 되어 참가한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님을 위한 길이어서 하나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1985-10-30
나에게 있어서 사법고시란 사적 욕망만으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통과의례와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내가 합격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마땅한 답변을 찾아나가는 과정이었던 까닭입니다. 나는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님을 향해 일기를 쓰면서 의지를 새로이 했습니다.
신록의 계절 5월, 동시에 피맺힌 5.18의 5월이다. 8년 전의 그 거대한 민주화를 지향한 민중의 함성이 군사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총, 칼, 몽둥이의 탄압에 의해 무참히 박살되던 그런 달이다. 이러한 달에 그리고 오늘의 상황에서 나를 한번 돌이켜 본다. 나의 지향점은 정해진 것인가.
1988-05-19
5.18로부터 8년이 흐른 뒤 다시 5월을 맞았습니다. 나는 피 맺힌 광주를 가슴에 새긴 채 나의 지향점을 고민하는 청년이 돼 있었습니다. 뒤늦게라도 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이었습니다.
일기의 시작은 1979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성남에 와서 소년공 생활을 한지 3년께 흘렀을 때입니다. 안동에서 국민학교 숙제 때문에 억지로 일기를 쓴 적은 있었지만 스스로 일기쓰기를 결심한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날로부터 시작된 일기는 가장 처절한 나날들을 무려 10년 동안이나 함께 걸어준 나의 유일한 길동무였습니다.
저녁에 와서 보니 재옥이가 내 일기장 뜯어서 제 노트처럼 쓰고 있다.
1979-12-20
무슨 놈의 공책이 이리 비싸냐? 300원씩이나 받게.
1980-09-25
사실 시간을 쪼개가며 공장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고단한 생활 속, 게다가 온가족이 단칸방에서 지내는 열악한 환경에서 날마다 일기를 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먹고 마련한 첫 일기장을 동생 재옥이가 제 멋대로 뜯어 써 화가 난 적도 있고, 비싼 공책 값에 푸념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벌써 두시 30분이 넘었다. 오늘이 벌써 내일이 된 모양이다. 엄마, 아버지, 형, 형, 동생, 동생의 숨소리가 들린다. 잠에 깊이 빠진 모습들. 이렇게 한 방에서 고생하며 살지만 이렇게 살더라도 정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살았기에 우리 형제는 우애가 있다고 생각된다.
1982-03-31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일기를 쓰고 있노라면, 풍랑이 일던 내 마음에 어느덧 평화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울 때면 일기를 더욱 열심히 썼습니다. 나를 달래줄 유일한 대상이 일기였던 것이지요.
그렇게 한동안 일기를 쓰다 보면 어느덧 한 고비를 넘기곤 했습니다. 마음을 잡았다 싶으면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은 채 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입시에 몰두하던 대학 합격 전 1년, 그리고 사법고시 합격 후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1년이 그랬습니다.
일기장은 그런 나를 언제라도 반겨줬습니다. 마치 내가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주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말입니다. 40년이 흘러 돌이켜본 일기장은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습니다. 그 시절의 결심을 되새기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고.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지금의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들려달라고.
이재명의 브런치 목요 매거진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는 판검사 대신 노동자를 돕는 인권변호사가 되겠노라고 다짐하는 이재명의 마지막 일기가 담긴 17화 <나의 꿈, 나의 바람>을 끝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다음주 최종화에 많은 기대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