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이재명의 이야기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님은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한시의 한 구절입니다. 부모님을 먼저 보내드린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후회와 죄송스러움이 밀려올 터이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철없던 시절 아버지께 품었던 모든 원망과 불만이 나의 오해에서 비롯하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오해의 장막을 걷어내고 다시 돌이켜 본 우리 아버지는 참 좋은 분이셨습니다. 한때의 방황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한 적도 있으셨지만 아버지께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남이라는 낯선 땅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온 가족을 불러 모아 새 삶을 일구기 시작한 이래,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아는 것이 가장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대학 중퇴의 학력으로 순경, 교사, 탄광 관리자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친척과 이웃들은 입사지원서나 신원보증서 같이 서류를 꾸며야 할 일이 있으면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서류만 잘 만드는 샌님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곤란한 상황에 대처하는 기지도 갖춘 분이셨습니다. 셋째 형의 대입 검정고시 원서를 제출할 때의 일입니다. 마감에 임박하여 안동에서부터 우편으로 형의 졸업증명서를 가까스로 받았는데, 그만 도장 날인이 누락돼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당혹스러움에 어쩔 줄을 모를 때 아버지는 집안을 구석구석 뒤지시더니 형의 졸업 앨범을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해질녘 돌아오신 아버지의 손에는 원서 접수증이 들려 있었습니다.
참말로 신통하다. 어떻게 됐던지 접수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1980-03-17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던 것 중 하나가 현재와 미래의 균형이었습니다. 헛바람이 들어 크게 실패했던 자신의 과오가 자식들에게 대물림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여 미래의 불확실한 꿈 때문에 현실에 등 돌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공부 때문에 일을 소홀하게 하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하셨던 겁니다. 심지어 밤늦게 불을 켜고 공부를 하면 어서 자라고 야단을 치셨습니다. 하루 종일 고단하게 일한 온가족이 단칸방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할 때 혼자서 공부하겠다고 가족들의 잠을 방해하는 것 역시 탐탁지 않으셨을 겁니다.
지금도 책 보는데 불 끄란다.
1980-01-09
의외의 면모도 있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은 한 번도 해주지 않으시면서도 내가 공부를 잘 하면 얼마나 기뻐하시던지요. 대입 검정고시 성적표를 받으러 다녀왔던 날, 쓸데없이 버스타고 다니며 돈 쓴다고 야단을 치신 것이 무색하게도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말씀드리자 돌연 얼굴 가득히 환한 웃음을 지으시던 아버지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관심과 사랑도 곧잘 표현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시장 청소부로 일하면서 집에 가져다주신 것은 썩은 과일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남매들이 읽으면 좋을 만한 책들과 영어회화 카세트테이프도 종종 주워 오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만의 사랑 표현이었습니다.
집에 오니 아버지가 책을 가져다 놔서 쓸 만한 것 몇 권 골랐다.
1980-01-15
사람들은 흔히 학교조차 다닐 수 없는 환경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사법고시까지 합격한 나를 가리켜 개천에서 난 용을 빗대어 이른바 개룡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나 혼자만의 힘과 노력이었는지 반추해봅니다. 아버지의 따끔한 가르침과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할 수 없었겠지요.
대입 학력고사를 넉 달 앞둔 때 공장을 그만 두고 공부에만 매달렸던 내게 학원비와 교통비를 대주신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사법고시 2차 시험에 낙방해 큰 좌절에 빠져 있을 때 고향에 가서 친구와 놀다 오라고 격려해주신 분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안동에 다녀온 덕에 나는 좌절감을 씻어내고 시험에 재도전할 용기를 얻었지요. 가족들은 2차 시험에 재도전하라며 십시일반 쌈짓돈까지 모아서 내게 쥐어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여 생활비 명목의 장학금도 받을 수 없게 된 즈음이었습니다. 그 쌈짓돈이 없었다면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도 없었을 겁니다.
집안 모든 식구들의 기대와 고생에 비추어 일분 일초를 다투어 소중히 알고 공부해야만 하는 시간인 것이다.
1985-10-18
아버지에게 위암이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졸업식에서 아버지께 학사모를 씌워드리고 한 달께 지나서였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솔직하게 내색하지 못한 슬픔은 일기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사법시험 2차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차에 아버지의 암 재발 소식을 접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목표로 공부에 전념하여 1986년 10월 23일, 드디어 최종 합격자 명단 속 내 이름 석 자를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이미 의식이 혼미한 채 사경을 헤매고 계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1월 24일, 아버지는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얼마 전 한식날에 형님 가족과 함께 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후회와 미련이 다시금 밀려 왔습니다.
아버지의 작은 잔소리 하나까지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왜 이렇게 늦게야 깨달았을까요. 아버지의 잔소리까지도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는 아직도 숱하게 야단을 맞았을 터입니다. 여전히 잔소리로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된 아버지의 무게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더욱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나는 영락없는 아버지 아들이니까요. 나의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15화 <꽃보다 청춘>에서는 첫 방학을 맞아 단짝 친구와 함께 무모한 무전 여행길에 오른 스무 살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