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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y 10. 2018

꽃보다 청춘

단짝과 무모한 여행길에 오른 스무 살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15화│꽃보다 청춘│©안다연



대학생이 됐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제 때 사법고시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던 까닭입니다. 더구나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학생을 종전보다 30%나 많이 뽑았습니다. 성적이 나쁘면 졸업을 할 수 없었고 취업전쟁도 심해졌습니다. 이른바 성적 압박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얼어붙은 마음 탓인지 국어과목 첫 작문 과제였던 ‘캠퍼스의 봄’ 답안지를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나의 몸은 꿈에 그리던 캠퍼스의 봄볕 아래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 온전하게 봄을 맞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82-03-26│이재명의 일기

                 


꽃피는 봄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습니다. 억눌러왔던 젊음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머리는 도서관에 콕 박혀 공부만 하라고 하는데, 마음은 자꾸 놀자고 말을 걸어 왔습니다. 갓 스물의 청춘에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건만 나는 번번이 죄의식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이런 번뇌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 것은 친구 정운이가 귀띔해준 고급정보(?)였습니다. 정운이는 오리엔트 시계 공장에서 만난 친구입니다. 함께 검정고시를 치고 나란히 같은 대학에 입학한 둘도 없는 단짝이죠.

 


중요한 예기를 들었다. 졸업정원제는 2학년 성적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매우 안심이 된다. 이제 1학년 때는 좀 놀아야겠다.
1982-04-24



1년 뿐이었지만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생긴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도서관에 자리만 잡아놓고 친구들과 함께 땡땡이를 치는 날도 생겼습니다. 밤 10시까지 연못가에서 손뼉치며 노래 부르고 놀다보니 비로소 캠퍼스의 봄이 무엇인지 느껴졌습니다.

      


학교란 곳이 좋기는 좋구나. 고성방가를 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1982-05-27     




첫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정운이와 함께 강원도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배낭도 사고 신발도 사고 낚싯대도 하나 장만했습니다.


                            

1982년 6월│강원도 여행 중인 청년 이재명



성북역에서 경춘선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조금이라도 빨리 닿고 싶은 마음에 출발 30초를 남겨둔 기차를 타느라 헐레벌떡 뛰었습니다.



붉은 스타킹에 흰 모자 청바지 흰 티셔츠 붉은 배낭 위에 라디오. 정말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으며 또한 남들이 내게로 관심의 눈길을 던져줄 때엔 마치 내가 야구장 우승팀의 4번 타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1982-06-29 



익숙한 일상을 떠나 예측할 수 없는 돌발을 맞이한다는 생경함이 여행의 매력입니다. 우리는 춘천에 있는 정운이의 큰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소양강댐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시외버스는 시내버스와는 달리 대학생 할인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비를 아끼느라 인제 가는 배 대신 양구 가는 배를 탔습니다. 뱃길은 운치와 낭만으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계획에 없던 경로였지만 말입니다.



1982년 6월│강원도 여행 중인 이재명과 친구 박정운



우연이 빚은 인연도 생겼습니다. 양구 가는 배에서 자전거로 전국일주 중이라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우리 학교 공대에 다니는 동갑내기였습니다. 우리는 즉석에서 배재영이라는 그 친구와 동행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과연 럭비공 같은 여정이었습니다.




1982년 6월│강원도 여행 중인 이재명과 친구들



저녁 무렵에야 양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재영이가 당장 인제로 가는 광치고개를 넘어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젊음의 피가 들끓던 우리는 저까짓 고개쯤 못 넘으랴 호기를 부리며 군인들이 말리는 데도 고개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달빛만 희미하고 별은 총총한데 굽이굽이 고갯길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혔고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휴! 첫 번째 나오는 소리
아이구! 두 번째 소리
1982-06-30     



턱끝에 숨이 차오를 때면 무모한 도전을 제안한 재영이에게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쉬지 않고 발걸음을 이어가자 광치고개는 점차 내 발 밑에 엎드리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걸음을 내디뎌야만 얻을 수 있는 정상의 쾌감이었습니다.



1982-06-30│이재명의 일기



와! 우......! 정상에 올라선 뒤 내뱉을 수 있는 표현은 이것뿐이었습니다.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 번이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올라올 때는 죽어라 고생을 했지만 안개가 흐르는 방향으로 하산을 하려니 기분이 너무 좋아 한참을 노래 부르며 노래를 부르고 고함도 질렀다.
1982-06-30     



그렇지만 만만치 않은 하산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목 아래쪽 뼈가 참을 수 없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결국 자전거에 매달려 가는 신세가 됐습니다. 친구들한테 폐를 끼친다는 게 몹시도 미안했습니다. 아무래도 더 이상 하산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우리는 어느 낯선 집 옆에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먹었습니다. 좁은 텐트 안에 몸을 뉘자마자 세 청년은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국민학교 이후로 처음 맞아본 나의 방학, 두 친구와 함께했던 짧은 여정은 훗날 긴 인생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는 교훈을 남겼습니다.



산은 구름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야 생각할 때 '과연 산이 구름에 가리어지지 않고 완전히 노출되어 모든 그 깊은 골짜기를 드러냈더라면 과연 지금까지의 그 긴 고갯길을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며 인생도 첩첩산중, 즉 한 가지의 고난을 극복하면 또 한 가지의 고난이 밀려오는 고해(苦海)이지만 인간은 새로운 고난이 밀려온다는 사실을 구름 덕분에 알지 못하고 마치 이런 고난이 지나면 행복의 창이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희망에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인간이 그러한 고난의 앞날을 훤히 내다본다면 인간은 괴로움에 힘들어하다가 결국은 우울하고 지겨운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 뻔하다.
여기서 인간은 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보이지 않는 구름에 가린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릴 때 그 과정 또한 커다란 의의를 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란 매우 큰 것이다.
1982-06-30



1982년 6월│강원도 여행 중인 이재명과 친구들




16화  <일기를 쓴다는 것은…>에서는 일기쓰기를 통해 성찰하고 성장하는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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