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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y 24. 2018

[최종화] 나의 꿈, 나의 바람

판검사 대신 노동자를 돕는 인권변호사가 되리란 꿈을 이룬 이재명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17화│나의 꿈, 나의 바람│©안다연



1986년 가을, 사법고시에 최종합격했을 때 한 신문사와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성남에 변호사사무실을 열어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일하겠다"고 당당히 포부를 말했습니다. "노력한만큼의 댓가는 꼭 돌아온다"는 신조도 밝혔습니다.



1986-11-04│경인일보│28회 사법고시 합격자 이재명 인터뷰




소년공 시절 수많은 사회의 부조리를 겪어서인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인권변호사가 되어 약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의 목표이자 소명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고시를 준비하는 내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던 그 목표는 막상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이후에 간혹 휘청이기도 했습니다.


연수원 선배가 소개해준 사회학과 여학생에게 호감을 느껴 몇 번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한 날 그녀에게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말했다가 그만 차이고 말았습니다. 크게 상처를 받은 나머지 굳었던 결심마저 흔들렸습니다. 성찰의 일기를 쓰면서 이내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녀를 몇번 만나지는 않았으나 정이 들었는데 막상 나의 인생 설계 때문에 그녀로부터 배척받았다고 생각하니 과연 나의 인생설계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 것 같다.
1988-04-24


1988-04-24│이재명의 일기




차라리 성적이라도 안 좋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나는 판검사 임용권 안에 드는 성적을 받아들었습니다. 날 위해 헌신한 가족들의 경제적 문제도 자꾸 눈에 밟혔습니다. 엄혹한 군부독재 시절에 인권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꽃길을 저버리고 고생길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까닭입니다.

      


우리집을 생각해보자.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임용받는 것이 나의 바른 처신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팽개치고 그런 소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1988-04-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던 초심을 쉽게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현직 임용만을 목표로 하는 몇몇 동기들과는 왠지 모를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이 되어야지 명사나 권력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부끄럽지 않은 나의 행태에 대해서 결코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나아가 그로 인하여 내 행동에 제약을 느껴서는 더욱 안된다.
1987-04-28



경제적 이익과 안정적인 미래,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위해 판검사가 되는 길도 상상해봤지만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느껴졌습니다.



현직에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정된 나의 인생설계에 어떤 방식으로 조응할 수 있는가. 모두 소극적으로 사건이 배당된 다음에야 그 일을 할 수 있고 막상 일이 내게 생긴다 하여도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1988-04-24




이러한 고민을 거듭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법연구회라는 학회 친구들과 가까이 어울리게 됐습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한 나에게는 진정으로 소중한 모임이었습니다. 경제, 철학, 역사, 정치 등 무엇 하나 깊이 공부해보지 못했던 내게 학회 친구들은 지식과 지혜를 한 없이 나눠줬습니다.


하루는 학회에서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분께 듣는 인권변호사의 삶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변호사는 굶어 죽지 않는다"던 그분의 말씀을 믿어보고만 싶었습니다.



1987-07-14│이재명의 일기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나의 지식과 자격을 필요로 한다. 역사가 민족이 노동자가 핍박받고 가난한 민중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열심히 성실히 살리라. 한순간의 시간도 결코 허비하지 아니하고 나의 무식성을 탈피하는 데 귀히 사용하리라. 1987-07-14


연수원 동기들과 함께




1988년 봄, 셋째 형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형은 '너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격려해줬습니다. 가족의 경제적 문제에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나의 초심대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라는 의미였습니다. 나는 그길로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방식과 경로를 거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1988-05-19│이재명의 일기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바랐지만 현실적인 형편 때문에 갈등과 번뇌를 거듭해야만 했던 시간. 속 시원히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만은 없었던 진로. 하지만 이렇게 동료들과 가족들 덕에 가슴 속에만 품어왔던 꿈과 바람은 조금씩 또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나는 성남을 새로이 일으킬 것이며 민주화의 기점으로 성장시킬 것이고, 나는 성남지역의 사랑받는 변호사가 될 것이다.
1988-05-19

  
1988-05-19│이재명의 일기



나의 지식과 능력, 지위가 성남의 지역운동, 그 중에서도 노동운동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1989-01-04



1989-01-04│이재명의 일기




그리고 몇 해 뒤, 나는 약자를 돕는 성남의 인권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부정부패와 비리를 처단하는 시민운동가도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성남을 일으키겠다는 30년 전의 다짐도 이뤘습니다.



부당 용도변경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운동가 이재명



권력의 부정부패를 파헤치는 시민운동가 이재명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파란 많은 삶이었습니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깊은 좌절의 밑바닥에서야 비로소 싹트기 시작했던 희망의 씨앗.

숨이 턱에 차도록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야만 겨우 문이 열리곤 했던 운명의 고갯길.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모른 채 뛰어 들었기에 정상의 희열을 맛볼 수 있었던 인생의 섭리.

만만치 않았던 하산길, 때로는 계획을 바꾸어 쉼을 가져야만 한다는 깨달음. 


40년 전부터 쌓아온 이 추억들은 지금도 나의 머리와 심장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를 동력 삼아 나는 오늘도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소년 이재명처럼 소외받고 억울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겠다는, 그렇게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나의 꿈과 바람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결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를 사랑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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