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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Oct 11. 2018

나의 소년공 시절 친구들

서로에게 의지하며 희망을 키웠던 이재명과 벗들의 이야기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19화│나의 소년공 시절 친구들│©안다연



중고등학교 대신 공장에 다녔다고 하면 일반적이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내가 다니던 공장에는 그런 소년공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자녀가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도록 하는 게 당시 가난한 가정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남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도 마음 시린 일이지만, 우리 소년공들이 청춘을 보내야 했던 공장의 몹시도 열악한 환경이 우리를 더 시리게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기름이 없다며 히터를 틀어주지 않아 손을 호호 불며 일을 해야 할 정도였지요.




1980-01-25│이재명의 일기



반장은 우리에게 이유 없이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우리 소년공들끼리 사소한 실랑이라도 하다 걸리면 지나치게 혼이 나곤 했습니다. 윽박지르고 고함을 치는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들마저 거칠어지기도 했습니다.


대입 검정고시를 앞두고 있을 즈음에는 정말로 공장에 다니기가 싫었습니다. 이른바 시다를 벗어나 진짜 공돌이가 되고, 산재도 두 번이나 당하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도 들고 꾀도 났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장에 갈까 말까 매일을 망설였습니다. 망설이다 공장에 나가면 또 이유 없이 욕을 먹었고, 욕을 먹으면 내일은 안 나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참으로 지겨운 쳇바퀴였습니다.



오늘은 늦게 일어나 가지고 가지 않으려다가 그럴 수도 없어서 회사에 출근했더니 반장한테 또 욕먹었다. 출근한 것이 매우 후회되었다. 낮엔 일거리가 많아서 힘들어 혼났다. 오늘 퇴근할 때 일찍 좀 나오려 했더니 안 되어서 5시 50분에 퇴근했다. 오늘 낮에 조퇴나 외출 좀 하려고 했다. 머리가 좀 아파서 그랬다. 그렇지만 오늘은 지각까지 했는데 그럴 수도 없었다.
1980-01-26




동료들 중에는 참으로 거친 녀석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체구가 작은 편인 데다가 산재를 당한 왼쪽 팔이 아파서 힘을 쓰는 쪽에는 끼지를 못했습니다. 다행히 머리는 좀 있는 편이어서 완전히 당하고 살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특히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으나 다시 소년공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을 때에는 재입사한 오리엔트 공장에 적응하기가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다시는 이런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며 큰 소리 땅땅 치고 나간 놈이 다시 왔으니, 사정을 다 알고 지내던 친구들까지도 텃세를 부렸습니다. 그저 '참는 게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며 꾹 참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1980-09-17│이재명의 일기



낮에 주용이하고 농담을 하는데, 얘가 남의 약점만 자꾸 끄집어내는 게 정말 기분 나쁘고 한심스러워서 욕 몇 마디 해버리고 다신 얘기 않겠다고 잘라버렸다. 정말로 치사한 일이어서 내 얼굴이 벌게졌었다. 최소한 난 남의 약점을 뜯지를 않는다. 그런데 걔는 내 약점만을 자꾸 잡아 뜯었다. 물론 내 잘못도 있으리라마는 역시 기분 나쁘다. 내일부턴 그 애와의 장난은 삼가리라.
1980-09-26




이러한 시절에도 소중한 우정을 맺은 소년공 친구가 둘 있습니다.


덕근이는 회사에서 견습공이라고 입사시켜 놓고는 일방적으로 유급에서 무급으로 전환되는 억울한 일을 당한 녀석입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내가 처음으로 목걸이 공장 다니던 시절에 사장한테 세 달치 월급을 떼였던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공장에서 일하느라 힘들 텐데 무급으로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오죽이나 억울했을까요.

      

그래선지 나는 덕근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덕근이와 장난치며 놀기도 했고, 매일 한 장씩 나오는 식권을 덕근이한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나 역시 거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는 소년공 선배였던지라 노상 다정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은 싸워서 말도 안 했고, 어느 날에는 지나치게 장난을 쳤습니다.


하루는 내가 장난으로 옥상 환풍기 앞에서 소변을 보겠다고 하자 덕근이가 그러지 말라면서 내 얼굴에 페인트를 묻힌 것이 장난의 시작이 됐습니다. 결국 덕근이의 얼굴과 머리에 페인트가 묻었고, 나의 코르덴바지는 페인트를 온통 덮어 썼습니다. 나는 페인트로 엉망이 된 코르덴바지를 복구하려 아세톤에 빨았습니다. 그날 나는 아세톤에 젖어 축축한 바지를 입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에 가야하는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덕근이는 사과의 뜻으로 빵을 조금 사왔습니다. 우린 빵을 나누어 먹으며 환한 웃음으로 서로 사과를 했습니다.육중한 기계 앞에 얽매여 있던 청춘의 힘겨움을 그렇게라도 해소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짓궂은 장난에 옷을 버리고도 빵 한 조각 나누며 금세 웃을 수 있었던 덕근이가 좋아서 그랬을까요. 아쉽게도 덕근이와의 우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대입 검정고시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잠시 공장을 그만 둔 사이, 덕근이는 다시 학교를 다녔기 때문입니다.          



1980-02-23│이재명의 일기





정운이는 오리엔트 공장에서 만나 함께 학원도 다니고 검정고시도 보고 같은 대학에 나란히 입학한 친구입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함께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던 그 절친이지요. 정운이와 친해진 것은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한참 방황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할 때 내 속마음을 털어 놓을 유일한 대상이 바로 정운이었지요. 하여 정운이네 집은 나에게 피난처와 다름 없었습니다. 정운이네 집에서 자고 공장으로 바로 출근하는 적도 더러 있었습니다.


정운이와 마음이 통하는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같은 꿈을 가진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정운이는 절실한 존재였습니다. 정운이가 학원에 나오지 않으면 걱정이 됐고, 아파서 공장에 못 나왔다고 하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요즘처럼 메신저로 언제 어디서나 소통하는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전화도 없어서 그저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작정 정운이 집에 찾아갔다 못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쓸쓸했습니다.



낮에 정운이한테 내일 오라고 했는데 올지 모르겠다.
1980-02-29


오늘 정운이가 오기로 했는데 오지 않았다. 그래서 병국이하고 자전거 타고 가다가 들렀더니 없었다.
1980-03-01



대입 검정고시를 50일 가량 앞두고 공장을 그만 둔 나와 달리, 정운이는 회사에 계속 다녔습니다. 철야에 잔업까지 하느라 학원에도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단짝이었던 내가 공장을 그만둬서 행여 서운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정운이 걱정으로 여러 날 마음을 졸였습니다.


학원에 갔더니 정운이가 나오지 않아서 정운이네 집에 갔더니, 철야 작업하는지 안 와서 회사에 가서 물어봤더니 철야한단다.
1980-03-12



저녁에 정운이가 며칠씩 학원에 안 나온다고 해서 회사에 가 보려고 나섰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정운이가 잔업하는가 물어보고 그냥 왔다.
1980-03-17



저녁에 야간 수업 듣는데 정운이가 안 나온다.
1980-03-20




꽃샘추위가 심하던 3월의 마지막 일요일, 집에 찾아가서야 한 달만에 정운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오후 1시부터 이야기하다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오리엔트 공장 동료들과의 야유회│앞 줄 오른쪽이 이재명




그 시절 정운이와 내가 밤을 새워가며 함께 꾸었던 꿈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운이, 그러니까 내 친구 심정운은 우리 중앙대학교 전기공학과를 나와서 한국전력주식회사에 입사, 한 지역의 지사장으로서 현재까지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정운이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봉사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정운이 역시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날이 쉽게 잊히지 않는 까닭이겠지요. 


소년공 시절의 친구들을 추억할 때면 아련하고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우리 중 스스로의 선택으로 공장에 온 친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나는 굳게 닫힌 공장 철문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을 다 하여 그 곳을 떠나왔지만, 끝내 그 짐까지 영영 벗어던질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 2월부터 브런치 목요 매거진에 연재한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에피소드를 엮어 책으로 펴내게 됐습니다. 그동안 독자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간에 즈음하여 미공개 에피소드를 모아 연재를 재개했습니다. 20화 <내가 좋아하는 것>에서는 시계와 낚시에 얽힌 소년 이재명의 일기장 속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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