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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Jul 02. 2018

쓰리 빌보드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하죠'


좋은 영화의 기준이라는 건 참 어렵다. 영화뿐만이 아닌 사람이 먹는 음식을 예로 들어 보아도 모두에게 '좋다' 또는 '훌륭하다'의 반응을 얻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취향이 좌지우지하는 것이기에 절대 강요할 수는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와 같은 작품이라면 강요하고 싶다. 이런 영화라면 자신 있게 좋은 영화이니 보고 또 보고 여러 번 곱씹어보라고 내가 아는 모든 이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짜임새 있는 각본과 힘이 실린 연출, 말 그대로 살아있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잘 어우러진 작품은 이렇게 강력한 스토리 텔링이 된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끔찍한 강간살인사건. 그리고 그 피해자의 어머니인 밀드레드는 7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는 수사와 이미 지난 일, 없던 일 취급해버리는 경찰에게 강력한 펀치를 세 방 날린다. '아무도 보지 않을 거예요' 라던 레드 웰비의 말과는 다르게 그 펀치는 허공을 가르지 않았고, 정확히 표적을 향해 날아갔고 많은 이들은 소리쳤다.

이 영화 속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캐릭터의 활용이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하면서 또 동시에 그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보통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처음의 등장과 마지막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쓰리 빌보드 속 캐릭터들은 꽤나 극단적인 방향으로 캐릭터의 색을 변색시킨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게 아닌 납득이 가는 방향으로 말이다. 작품 속 캐릭터들이 이처럼 살아있다 라는 게 느껴지는 영화가 얼마만인가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이다.

엄마와 딸의 대화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던 밀드레드와 안젤라와 마지막 대화는 머릿속을 꽤나 복잡하게 만들었다. 불이 꺼져있던 아니 다시는 켜지지 않을 딸의 방에서 그날의 그 대화를 회상하는 밀드레드의 뒷모습은 '아픔'이라느 단어가 가볍게 느껴지리만큼 보기가 괴로웠다. '그래 강간이나 당하지, 뭐!'라는 딸의 말에 정작 그녀가 뱉어낸 답은 '그래 강간이나 당해버려라!'가 다였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캐릭터는 모두 분노를 표출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출해내는 분노를 보는 것만으로도 참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극적인 광고판을 세우기도, 누군가는 그 광고판을 태우기도, 또 누군가는 사람을 창밖에 던지기도 하는데 반면에 어떤 이는 꼼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며 빨대를 꽂아주는 방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대신하기도 한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까지 밀드레드는 본인이 원하는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분노하고 괴롭기를 반복할 뿐 원하는 답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그녀의 현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타까울 정도로 답답하였다. 그런 생각이 진해지는 시점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 '쓰리 빌보드'를 지나치면서 툭툭 뱉어지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화는 나의 그런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듯했다.


그럼 누가 그랬겠냐고 말하는 딕슨과 웃음을 보이는 밀드레드. 가면서 결정하자고 말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그녀이지만 더 이상의 외로운 싸움은 하지도 않아도 될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놓일 때쯤 엔딩 크레딧은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가 끝이 나서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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