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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Aug 24. 2018

어느 가족

'글쎄요.. 뭐라고 불렀을까요?'


광화문에는 '씨네큐브'라는 영화관이 존재한다. 약 10년 전 처음 알게 된 공간이자,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녀'를 관람한 이후로 아주 오랜만에 방문이었다. 오직 두 개의 상영관만이 자리하고 있으며 영화는 티켓에 적혀있는 정시에 정확하게 사전에 광고 없이 칼같이 시작을 한다. 생수를 제외한 음식물은 반입할 수 없으며 모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상영관의 조명은 켜지지 않는다. 영화를 즐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을 꽤나 자주 하곤 한다. 


이러한 곳에서, 오로지 영화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수 있는 이러한 공간에서 관람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가족' 이란 단어의 의미와 가치관을 재확립시켰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강한 울림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영화를 보고 하루 지난 지금 인상 깊었던 시퀀스와 대사들을 정리하면서 느껴지는 이 떨림은 여타 어느 작품에서도 느끼기 힘들었던, 바로 '어느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강한 메시지가 존재한다는 걸 검증하는 듯했다.

저마다의 아픔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가족이라니.. 이 설정부터가 나는 아주 소중한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매 순간이 슬픈 삶은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간의 슬픔이 없는 삶도 원하지 않는다. 아픔과 슬픔이 없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슬프다. 


나의 슬픔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들은 서로의 슬픔에 대해 묻지 않는다. 슬픔을 품에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이란 걸 알기 때문인 것일까, 이들은 단지 그 슬픔 위로 작은 돗자리를 펴고 같이 눕자고 말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온 가족이 다 같이 하늘을 바라보던 시퀀스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분명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펑, 펑'하는 소리만 들려올 뿐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의 모양을 그들은 볼 수 없다. 사실 그들에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불꽃놀이가 보이지 않으면 어때, 우리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면 어때, 불꽃놀이를 들을 수만 있어도,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장면 속 그들의 눈빛이 내 안에서 쉽사리 꺼지지 않을듯하다. 

누군가의 슬픔을 안아준다는 것, 이 몇 마디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나의 가치관과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어나지 않을 상황들이 누구에겐 현재이고 오늘이다. 다른 이의 슬픔을 안아주는 일,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은 '가족'이라 불려 마땅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유리라는 순수한 어린 소녀의 캐릭터를 활용해 다시 한번 '가족' 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투영시키는데 가히 가족영화의 '정수' 라 불릴만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가 생각하는 '가족'은 이런 것이며 그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제작하고, 그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이해시킨다. 


영화감독으로서 그가 가진 진정성과 가치관을 가슴 깊숙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사람과 동시대에 살아간다는 게,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여겨질 정도로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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