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당신의 눈을 찌르는 꿈을 꿨어요’
이런 영화를 본 뒤에 영화관을 나서는 길이면 어떤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서 발걸음이 무거워져 내딛는 걸음걸음이 힘에 부침을 느낀다. 어떤 장면 하나도, 대사 하나도 허투루 담아내지 않으니 119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가지는 시간의 질량이 기존의 다른 영화들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결코 우연이나 기분 탓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여왕 ‘앤’, 그 권력을 마음껏 주무르는 ‘사라’ 와 그 권력을 탐하는 ‘애비게일’ 까지 이 세 주인공이 주축이 되어 영화는 파멸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전진한다. 권력의 끝, 파멸 속으로.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도형으로 정의하자면 정확한 모양의 삼각 형태 즉 정삼각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이 지극히 평면구조적인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데서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입체적인 구조의 삼각형태인 피라미드가 아닌 평면에 그려진 삼각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관계이기에 바라보는 방향을 조금만 틀어서 바라 보아도 관계, 그 정점에 서 있는 자와 아래에 머물러 있는 두 사람이 또렷하게 구분이 된다. 그 상하가 뒤집어지는 것 역시 종이 위에 그려진 삼각형을 돌려보는 것만큼 쉬워 보인다는 것이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세 관계가 가진 중요한 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서, 그 권력을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해서, 정녕 양 손에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다고 해서 우위에 서 있는 것도 열세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니란 소리다.
이 작품은 여러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중 눈에 띄게 훌륭한 점은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데에 있다. 오브제를 통해서 각 인물들이 놓여 있는 현실 또는 심리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해내는데 시대적인 배경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의 처지와 성향을 보았을 때 의상이나 액세서리와 같은 오브제가 인물에게 지니는 의의는 결코 작지 않다. 이러한 외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보여주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똑똑하게 활용을 해내는데 이러한 사물들이 작품 안 시대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지니는 경제적, 물리적인 가치를 생각해 보았을 때 이는 결코 단순한 배치가 아님을 암시한다.
여왕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말하던, 애비 게일의 부족한 사격술을 키워주던 사라는 자신이 거느리는 하녀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탄약을 갈아주고 그 총을 손에 쥐어준다. 어떻게 보면 사라는 극 중 가장 진실되고 일관된 스탠스를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단지 이 캐릭터의 관점에서 흘러가는 스토리라인을 집중해서 다시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고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흐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지만 인간이 가진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 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초라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퀀스가 기억에 남으면서 카메라, 즉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이 어안으로 표현되는 촬영 효과, 음악의 존재감 역시 유니크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비단 과거만을 잊는 것이 아닌 현재 자신이 누리는 상황이 ‘누리는 것’ 이 아닌 당연한 것이 되는 순간 내 눈앞에 행복과 기쁨조차 쉽사리 망각하곤 한다. 사랑을 갈구하고 권력을 갈구하고 결국 본인이 가지지 못한 결여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슬퍼하고 소리치며 분노한다. 결국 가지고 나면 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걸 경험을 통해 충분히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그 어리석은 실수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반복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이미 당연한 것이 되고 가지지 못한 것을 탐하기에 욕망은 무서운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정할 수 없기에 욕심은, 욕망은 섬뜩한 것이다.
보고 싶은 작품들도 많고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도 많은 요즘 극장가에서 같은 영화를 재관람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어들이는 마성의 매력을 지닌 ‘란티모스’ 감독의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크린에서 내리기 전에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작품이다.
그만큼 매력적이며 흡입력을 가진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