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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Mar 19. 2019

그린 북

‘외로워도 먼저 손 내미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영화를 보고 나서 스스로를 두 번 꾸짖었다. ‘이 좋은 영화를 이제서야 보다니’ 그리고 ‘이 좋은 영화를 혼자 보러 오다니’ 하며 말이다. 개봉한 지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느지막이 관람한 2019 아카데미 작품상의 주인공 ‘그린 북’ 은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 영화를 봤다는 것에 있어서 죄책감이 들만큼 엄청난 울림을 안기는 작품이다. 이처럼 좋은 영화를 다른 누군가와 아닌 혼자 가서 보다니, 이건 반성할만하다.

차별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는 그간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었다. 기존의 작품들과 ‘그린 북’ 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 자체의 호흡에 있다고 느꼈다. 선명하고 무거운 주제의식을 향해 영화는 급하지 않게 천천히, 동시에 그 안에 적당히 위트도 섞어가며 그 끝을 향해 나아간다. 적절히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웃음이 펑하고 터지는가 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숨이 턱 하고 막히며 울컥했다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영화는 여러 시퀀스에서 우리는 이처럼 각박하고 불합리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은 따뜻하다고, 아직은 아름답고 살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는 두 번의 비슷한 상황을 보여준다. 비가 세차게 퍼붓는 날 두 사람을 향한 걱정이 아닌 의심을 앞 장세 워 총구를 들이밀고 유치장에 가두는 경찰들이 있는가 하면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두 사람을 향한 진심을 스크린 가득 채우며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라고 말하는 경찰도 있다. 앞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또다시 비루하고 비상식적인 상황을 짐작했던 관객들을 향해 말 그대로 시원하게 한방 날린다. ‘당신 방금 또 의심했어’ 라며 말이다. 때로는 이러한 뻔하다면 뻔한 반전이 더 아름답게 그리고 더 오래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극의 초반부에서 단지 유색인이 입을 댔다는 이유만으로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컵을 넣었던 ‘토니’ 에게 그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그의 부인 ‘돌로레스’ 는 제 남편을 변화시킨 ‘셜리’ 에게 편지 쓰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신하며 그 마음을 전한다. 토니를 향한 본인의 사랑이 비로소 그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해 주어 고맙다고 말하는듯한 장면은 옅지 않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 그린 북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관객들에게 따뜻함을 잃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며 막을 내린다.

그린 북, 영화의 제목인 ‘그린 북’ 은 제목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어딘가 활기차 보이고 생기가 돋는 느낌이 든다. 초록색이 주는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색에 대한 인식 때문일 텐데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역시 편견이었음을, 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자각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이 조그마한 책의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사회 속에 깊게 내재되어 있는 불편한 현실을 마주 봐야 한다. 애써 외면한, 알려고 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을 말이다.


불편한 것. 사소한 것부터 사소하지 않은 것까지 나는 하루 동안 얼마나 다양한 불편을 옆에 끼고 사는지를 돌아보았다. 날이 제법 따뜻해지니 추위를 막아주던 코트는 불편한 것이, 교통체증이 심해지니 버스는 불편한 것이, 사람이 많아지니 지하철은 불편한 것이, 나에게 필요로 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불편한’ 무언가가 돼버린다는 거에 대해 딱히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불편하기도 했다가, 편하기도 했다가 오롯이 내 선택이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롭고 내 존재의 이유만으로 구속받는 시대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불편함을 느껴보지 않았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평생 겪어볼 수 없기에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비단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입에서 태어나는 말이 누군가의 귀에서 조롱이나 비아냥으로 부화할 수도 있다는 정도의 사리판단을 할 줄 아는 것, 그러니 해서는 안된다는 간단한 공식 정도를 암기하고 있는 수준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조차도 왜 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딱 한 번만 더 친절하게 답하겠다.

당신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추가로 바로 내 앞자리에서 영화를 관람한 커플은 영화를 보는 내내 리액션이 소위 말해 살아 있었다. 본인들의 시선에서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누가 들어도 과하게 높은 데시벨의 웃음소리와 말소리는 적어도 상영관 안에서는 유쾌하게 들릴 리 없다.

엔딩 크레딧이모두 올라가고 조명이 켜지는 순간, 이 좋은 영화로 인한 내 여운도 잠시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영화를 보는 내내 ‘푸하하하’ 하고 웃음소리를 자아내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버려진 빈 플라스틱 병, 바닥에 나뒹구는 과자봉지는 영화 속 ‘토니’ 에게 창밖으로 던진 컵을 다시 주워 오라고 말하는 ‘셜리’ 를 당장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을 만큼 눈에 거슬렸다.

한편 예전에 한 번은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오는 길에 누군가 쏟은 팝콘 위에 놓인 영화티켓, 그리고 그 위에 적혀있던 메시지를 본 적이 있다. ‘모르고 떨어트렸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비슷한 듯 많이 다르게 오버랩되는 두 상황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얼마나 복잡한 곳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정녕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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