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믿게 허느냐‘
이수진 감독의 ‘우상’ 은 감독의 전작품인 ‘한공주’로 인해 풍선처럼 부풀어진 내 기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이 먼저 그리고 짙게 남는 작품이다. 감독의 전작품인 ‘한공주’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보더라도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하게 보이기에 그 여운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세상과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과 인식에 대한 변화를 꾀하는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그 하나만으로도 대단하고 ‘좋은’ 영화라고 불려 마땅하지 않은가. 혹시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2004년도에 일어난 밀양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배우 천우희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 한공주를 적극 추천한다.
사실 장면 장면을 나누어서 본다면 촬영의 구도나 극 중 주인공들의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연출들은 굉장히 돋보였다. 표현력의 한계를 넘어서는듯한 몇몇 장면들은 정말 예술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단점을 상쇄시키는 데에는 역시 한계가 있다. 영화는 광고가 아니기 때문에 순간의 장면이 매력적 혹은 예술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고 해도 결국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어떠한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중심 뼈대를 제대로 잡고 가지 못하는 듯한 기분을 씻어내기가 힘들다.
어떤 부분이 몇몇 단점들을 더욱더 단점처럼 만드는지를 며칠 영화를 본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계속해서 밟히는 점들이 보인다. 우선적으로 배우들의 대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극 중 캐릭터의 성격이나 환경을 가늠하고 보더라도 조금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몇몇 시퀀스는 간절하게 ‘10초 전’ 버튼 혹은 자막이 필요로 할 만큼 전달이 되지 않았다. 영화와 나 사이에 어떤 벽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둘째로 꽤나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캐릭터들의 심리상태를 보는 이로 하여금 납득이 가게끔 하는 장치들이 부족하다. 복선이 회수되는데도 불구하고 극의 몰입감이 오히려 저하되는 까닭은 바로 이 부분이다. 지극히 인물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에서 인물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 혹은 표현이 부족하니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거기에 144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이 단점의 질량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시작부터 끝까지 놓지 않고 긴장감을 이어가는 점을 장점이라 말하고 싶다가도 위에 말한 단점들이 이 긴장감을 좋은 점이 아닌 불필요한 설정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단점을 장점으로 상쇄시키는 작품들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우상’ 처럼 단점이 장점을 집어삼키는 경우는 드물며, 드물기 때문에 더 아쉽다. 그럼에도 인상적이다 못해 너무 ‘좋은’ 영화였던 ‘한공주’를 연출했던 이수진 감독이기에, 다음 작품을 한번 더 기대해보려고 한다.
개인이 아닌 사회가 만든 ‘우상’ 이란 존재는 그렇지 않아도 그렇다고 믿게 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믿게끔 만드는, 한 개인이 안고 가기에는 과한 그리고 섬뜩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내리는 이성적인 판단보다 남들이 가진 인식과 생각이 우선이 되는 순간, 내 주관이 배제되는 순간, 이 사회에서 내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없으면 이 사회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