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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Aug 23. 2016

목적지 없이 떠나는 '사랑'이란 여행

'너'를 알기 위해 시작해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밤이 한없이 짧게 느껴진다. 그런 날이면 밤과 아침의 경계가 참으로 모호하다. 사랑은, 존재 너머에 있는 커다란 동심원이 나를 향해 밀려드는 것인지 모른다. 그 동심원 앞에서 우린 진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원은 뭐든지 될 수 있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시대, 혹은 하나의 우주.


그런 면에서 사랑이란 감정은 은유를 닮았다. 사랑이 싹트면,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도 ‘내 마음은 호수요’ 같은 은유적 문장을 습관적으로 동원하며 연정을 드러낸다. 수줍고 은밀하게, 햇빛이 못 미치는 우물 속 깊은 곳에서 순수한 수맥(水脈)을 퍼 올리는 일처럼 조심스럽게... 왜일까? 마음이라는 종이 위에 시적인 표현이 시도 때도 없이 자라기 때문이다.


몇몇 작가들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라고.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건 '사랑의 상흔'도 마찬가지다. 이별을 겪는 순간 누구나 시인이 된다. 한동안 가슴속으로 애틋한 그림을 그리거나, 그리움을 글감 삼아 절절한 시를 적어 내려가며 살아간다. 그렇게 하루를 견딘다.


최근 한 후배 녀석이 7년 넘게 사귄 여자와 실컷 싸우고 헤어졌다. 녀석은 그녀를 잊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내게 술을 사 달라고 했다. 술자리에서 후배는 옛 여자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난 만고불변의 진리가 떠올랐다. 늘 술이 문제다! 술! 중요한 건 평소 문학이나 드라마와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는 거다.


"선배, 우린 목적지 없이
여행길에 올랐던 것 같아요.
무작정 긴 항해를 떠난 거죠."


녀석의 표현이 그랬다.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종착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둘만의 여행을 떠났으나, 어디선가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길을 잃었노라고. 술자리가 파할 무렵, 녀석은 이런 말을 보탰다. “한편으론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도 들어요. 사랑과 이별을 겪으면서 내 감정의 민낯을 전보다 깊이 있게 들여다본 것 같아요. 그녀와 헤어진 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됐어요. 아무튼 긴 여행을 한 듯해요."


후배는 전두엽이 잘려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 표정은 ‘제 사정을 들었으니 이제 형식적인 위로나 격려라도 좀 해주세요. 그래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요’ 하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만 지나면 곧 무뎌질 거야”라거나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이 있잖아” 같은 식상한 멘트를 쏟아내며 어설픈 위로를 건네기 싫었다.


그저 뜬금없이 류시화 시인의 ‘나무의 시’에 나오는 짤막한 구절을 들려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후배의 넋두리를 듣다 보니 오래전 나를 스쳐 지나간 추억과 상념이 스멀스멀 피어올라서, 녀석이 들을 듯 말 듯 한 소리로 혼자 조용히 읊조렸던 것 같다.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난 건하게 취한 후배를 택시에 욱여넣다시피 한 다음 심야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옆좌석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키득대고 있었다. 그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사랑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생각했다.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뛰어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된다.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늘 사랑을 시도한다. 서로의 마음을 탐험한다. 어디 사랑뿐이랴. 살다 보면 그 끝을 알면서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니 함께 사랑을 시작했던 상대방이 어느 날 "여기까지만.."이라는 말을 내뱉어, 심장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해 동강이 나더라도, '끝장'에 대한 귀책사유나 과실 비율을 따지지는 않도록 하자.


어차피 끝을 알면서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잘못한 게 아니야"라고.

"우린 지금보다 더 아픈 세상에서 잠시 함께했을 뿐이야. 그때 난 당신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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