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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주 Oct 08. 2016

말과 글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

언어의 차가움과 따뜻함에 관하여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수명이 점점 짧아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아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계절 중엔 특히 가을이 그렇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가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을엔 모든 게 그리워집니다. 가을이 시작되는 때는 입추가 아니라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을은 분명 '그리움'이란 단어와 함께 시작됩니다.

부산 청사포에 있는 카페 '루프탑'에서

한낮에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 바람과 하늘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계절과 기온의 변화 때문일 테지만, 그리움의 몸짓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느 시인이 그랬습니다.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 바람이다"라고요. 일리가 있습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그리움들이 부대끼는 동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움들이 너무 외로운 나머지 서로 부둥켜안으며 우는 소리가 아닐는지.


나름의 온도를 지니는 게 어디 하늘과 바람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구사하는 말과 글에도 엄연히 온도차가 존재합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고 할까요.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어떤 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민을 털어내고,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건네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반면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이는 정서적 화상(火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 상대의 마음을 돌려세우기는커녕 꽁꽁 얼어붙게 하죠.


삼청동 근처 어느 카페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될까요? 물론 상황과 사람과 관계와 감정에 따라 다를 테죠. 다만,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났다면 '말 온도'가 너무 뜨거웠던 게 아닐까요. 한두 줄 문장 때문에 누군가 당신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 '글 온도'가 너무 차갑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요.


평소 전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실으면 몹쓸 버릇이 발동합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곤 합니다. 그들이 무심코 교환하는 말 한마디, 끄적이는 문장 한 줄에 절절한 사연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꽤 의미 있는 대화가 귓속으로 스며들 때면, 어로(漁撈)에 나갔다가 만선의 기쁨을 안고 귀항하는 어부처럼 괜스레 마음이 들뜨곤 합니다. 일상이라는 바다에서 귀한 물고기를 건져 올린 기분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쓰면서 채집한(?) 적당히 따듯한 말과 단어 한두 가지를 슬며시 적어볼까 합니다. 언젠가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듯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전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습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제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습니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습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챕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깁니다.  


몇몇 시인과 작가도 말했습니다.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마음 한구석에 흠집 없는 사람은 없다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조금 덜 아픈 사람이 조금 더 아픈 사람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는 것일 뿐이라고.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고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요?


이태원 '앤트러사이트'에서

이번엔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한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린 식전 댓바람부터 물을 먹고 나중엔 아침을 먹고 낮엔 커피를 먹고 혹은 직장에서 욕도 먹고 저녁엔 괴로운 마음에 술을 먹습니다. 고로, '먹는다'는 동사는 '살아간다'는 말과 동의어일 것입니다.


상대방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건 잘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엄마다... 밥은 챙겨 먹었느냐? 얘야, 잘 살아가고 있느냐..."


'밥 먹었냐'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많습니다. '그냥'이란 단어도 그중 하나일 테죠. 전에 버스 안에서 일흔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봤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0분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습니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했습니다.


“아비다. 잘 지내? 한 번 걸어봤다….”


을지로 '커피한약방'

대개 부모는, 특히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번 걸었다”는 인사말로 전화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보는 것일까요. 심심해서?


그럴 리 없죠.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 추측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전화가 자식의 일상을 방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에, “한 번 걸어봤다”는 상투적인 멘트를 꺼내며 말문을 여는 것은 아닐까요. 행여나 자식이 “아버지, 지금 회사라서 전화를 받기 곤란해요” 하고 말하더라도 “괜찮아, 그냥 걸어본 거니까"라는 식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덤덤하게 전화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냥 걸었다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표현의 온도는 자못 따듯합니다. 그 말속에는 “안 본 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러주렴” “보고 싶구나. 사랑한다” 같은 뜻이 오롯이 녹아 있기 마련입니다. 주변을 보면 속 깊은 자식들은 부모의 이런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냥 한 번 걸어봤다는 부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평소보다 더 살갑게 전화를 받습니다. 전화기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귀를 바짝 가져다 대죠.


거리에서 혹은 카페에서 “그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습니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합니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섬세합니다. 단, 섬세한 것은 대개 예민합니다.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가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때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입을 닫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잘 말할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제 언어의 총량(總量)과 온도에 관해 고민합니다.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너무 뜨겁고 차가워서 땅에 묻어야 하는 언어를,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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