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 이전에 유비쿼터스라는 키워드가 한참 언론에 오르내릴 때부터 기술혁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었다. 동기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내 정서적 환경을 분석해보면 이 사회의 일원으로 오롯이 한 가정을 꾸리며 내 사업체를 가지게 되는 시점이 1999~2000년이라서 밀레니엄에 대한 새로운 변화에 관심과 기대, 그리고 뒤쳐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함께 내 마음에 있었지 않았나 싶다.
출처: 유비쿼터스 세상 추상 이미지(2003년 포함공대신문)
유비쿼터스는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는 세상,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네트워크의 혁신성을 바탕으로 한 비약적 컴퓨팅 기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비쿼터스는 늘 컴퓨팅이라는 단어와 한 쌍을 이루며 등장했다. 현재 현실화된 기술 결과로는 사물인터넷(IOT)을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비쿼터스는 2006년 아이폰의 등장으로 디바이스, 디스플레이 발전의 저변화를 꾀하는 과정으로 치부되며, '유비쿼터스'와 늘 함께 등장하던 '컴퓨팅'에 모든 초점이 맞춰지며 급진전되었다. 그 결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변혁-자연으로 비유하자면-대지진을 일으켰다.
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지진을 촉발시킨 동력은 유비쿼터스라는 네트워크 초연결 시대의 실현이라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인 AI(인공지능)가 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네트워크 활성화로 쌓인 빅데이터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언급은 이미 1900년대 컴퓨터의 개발로 수차례 있어 왔었다. 하지만 그 기술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밑천(?)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밑천이라는 표현이 다소 경박할 수도 있으나, 생득지라는 표현은 지식적 배경에 국한된 표현 같아 보다 더 쉽게 와 닿도록 밑천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을 양해 바란다. 인간의 밑천은 유전자다. 인간이 태어나 학습을 통해 얻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습이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지식, 정보, 감각 등에 축적된 밑천은 실로 형언할 수 없이 중요하며, 우리가 살아가는데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막강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노암 촘스키(학자)의 언어생득주의이론 등장 이전까지는 기존 언어학에서 인간이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은 학습에 의한 결과라는 언어학습이론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노암 촘스키는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방식이 학습하는 것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인간은 이미 생득적으로 언어 구사력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 근거로 가장 설득력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어린아이가 문법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말을 통사론적으로 응용해서 구사한다는 설명이다. 즉 단어를 배운 뒤에 그 단어에 붙는 조사, 그리고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의 어순을 별도의 문법 학습 과정이 없었음에도 충분히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영어를 비롯한 제2외국어 수업시간에 아무리 문법을 배워도 작문 하나 하기 쉽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런 과정 없이 어떻게 말을 문법적으로 구사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 우리는 국어시간에 문법을 배우고서야 내가 사용하는 말의 어순을 알게 되지 않았는가?! 아이러니하긴 하다. 노암 촘스키의 주장대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언어적 문법에 대한 알고리즘을 탑재한 것이 아닌지 설득된다. 그래서 근래 언어학자들은 언어 습득에 대한 견해가 분분하다고 한다.
이렇듯 인공지능이 실현되려면, 우선 인간의 타고난 밑천을 컴퓨터에도 심어야 하는데 이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인지능력을 컴퓨터가 갖게 하려면, 인간의 오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듣고 보는 것에 변별력을 갖도록 해야 하는데 개와 고양이를 구분함에 있어서 컴퓨터에게 이를 학습시키는 과정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왜 불가능했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개와 고양이를 우리가 구분하는 방법은 이목구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 이목구비에 대한 정의부터 해야 하는데, 눈/코/입/귀를 정의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설령 아주 어렵게 그것에 대해서 정의를 내려 컴퓨터에게 알려주었다고 하더라도 개와 고양이의 미묘한 이목구비의 차이점을 사람처럼 시각적으로, 즉 이미지로 구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유는 각 이미지 데이터의 변화무쌍한 변수를 변별하고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이미지 크기부터 배경, 해상도, 빛에 의한 음영 그림자, 각도 등에 따라 데이터는 천차만별일 테니 말이다. 더불어 개와 고양이의 종류 또한 잡종까지 합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실현 불가능한 분야였다.
그러나 네트워크 활성화로 전 세계 인구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일상을 SNS에 올리고,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모두 다 카메라와 녹음기를 지니게 됨으로써, 인간이 보고 듣는 정보가 데이터로 어마어마하게 축적되면서 말 그대로 '빅데이터'가 출현하게 되고, 인공지능에 밑천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개와 고양이에 대한 구분도 굳이 어려운 프로토콜의 알고리즘 필요 없이 일대일 학습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개, 고양이 이미지를 태깅(tagging)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것이 빅데이터를 통한 머신러닝의 결과다. 그러다 보니 특정 개의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TMI(too much information)로 그 개의 주인, 친구, 사는 곳까지 모두 알고자 하면 알 수 있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매사에 늘 맞닥뜨리는 가장 큰 고민인 선택과 집중에 대한 판단의 대안으로 각 분야에서 각광받게 되었다. 데이터 분석부터 예술, 창작, 그리고 심리 상담까지 그 영역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온톨로지(Ontology)라는 키워드에 주목하게 된다.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현실과 똑같은 공간을 디지털에 구현한 가상현실. 목적은 현실에서 발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예측 시뮬레이션으로 출발했으나 이제는 그 개념을 뛰어넘어 현실과 가상을 구분 없이 경험하고자 하는 공간으로 발전 기획됨.
온톨로지(Ontology)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서로 간의 토론을 통하여 합의를 이룬 바를, 개념적이고 컴퓨터에서 다룰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한 모델로, 개념의 타입이나 사용상의 제약조건들을 명시적으로 정의한 기술(위키백과 인용). 즉 궁극적으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현실 속 개념을 디지털화하여 가상현실에서도 적용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해당 키워드를 접한 것은 몇 년 되었으나, 유비쿼터스처럼 이 단어들도 또 다른 무엇을 위한 저변화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 단어를 설명한 문구는 내가 이해하는 것을 첨언하였으나, 해당 개념은 더 발전되고 성장할 것으로 확신한다. 이전 유비쿼터스가 4차 산업혁명을 불러왔고, 그것의 중심에 AI가 있었듯이 이제 인간은 디지털 트윈, 온톨로지라는 것으로 인공지능이 아닌 디지털 인간을 하나 더 만들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단순한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의 캐릭터 아바타가 아닌 현실과 똑같이 만든 가상현실 속 디지털 트윈에서 살아가는 내가 삶의 터전을 옮겨 디지털 휴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뭔가 떠오르지 않나?
바로 영화 매트릭스다. 매트릭스 세상이 현실화되는 날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이 나뿐 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영화가 미래를 반영한다는 말은 어떠한가? 예측하기보다는 영화로 미래를 그리기에 과학자, 개발자 등이 자신이 영화를 통해 보고 듣고 간접 경험한 세상을 자신도 모르게 기획하고 개발하는데 무의식, 전의식, 의식의 단계처럼 발현된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그리고 디지털 트윈, 온톨로지와 같은 키워드들이 향하는 지점은 자연스럽게 매트릭스 세상을 예측케 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대지진의 본진은 아직 시작조차도 안 한 것이다.
디지털이라는 가상현실은 이미 존재한다.
그리고 아바타도 존재한다.
4차 산업혁명은 시작되었다.
그 과정의 핵심 키워드로 나는 이제 인간의 자기 복제-셀프 리플리컨트(Self-Replicant)라는 단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자기 복제(自己複製, self-replication)라는 개념은 이미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리플리컨트는 공상 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존재했다. 해당 의미도 유전공학적으로 사람이 복제되는 생물학적 인간 복제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내가 언급한 자기 복제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셀프 리플리컨트를 의미한다. 즉 자기 복제는 생물학적 복제보다 디지털 세상에서 먼저 실현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다른 글 '4차 산업혁명 쉽게 이해하기: https://brunch.co.kr/@2lab/41 '에서 4차 산업혁명의 동기, 출발점은 자아실현이라고 적은 바 있다. 인간의 욕망은 거스를 수 없다.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속 자신의 모습에서 변화의 한계는 분명함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디지털은 급성장 해왔다. 이제 그 본질의 문턱에 왔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 생물학적 인간복제는 우리가 제도적, 윤리적으로 막았을 수 있을지언정, 가상현실 속 디지털화된 인간복제를 막는 것은 그닥 명분도 이유도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즉 제도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기술적 도구적 저변화만 갖추면 실현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더구나 코로나19의 펜데믹의 패닉에서 그 필요성을 경험한 바,
이제는 우리가 살아갈 공간이 현관 밖의 세상이 아니라 손에 잡히지 않는 온라인 디지털 가장 현실속임을 직시하고 이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