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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Jul 10. 2020

오늘을 버티게 해주는 시

 <즐거운 편지>, 황동규

힘겨운 오늘이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친구에게 <7년의 밤>이란 소설을 빌려준 적이 있다. 나는 이 책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오영제’라는 악역이 흥미로웠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자세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분명 나는 그때 오영제란 캐릭터에 매료됐다. 그를 지지하거나 도덕적 면죄부를 주려 하지는 않았다. 오영제의 심리묘사가 괜찮아서 저런 사고방식이면 저럴 수도 있겠다 여겼다. 행동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해는 갔다. 저렇게 비틀린 인간으로 성장하기까지 자신을 바로잡아줄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한 오영제를 조금은 측은하게 여겼다.


책을 돌려받으며 친구와 감상평을 나눴다. 친구는 오영제를 이해할 게 뭐가 있냐며 그 캐릭터가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과분한 짐승이라 평했다.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내 감상이 잘못됐나?’ 그 쓰레기 범죄자를 옹호한다–실제로 옹호하지는 않지만-고 비춰지는 것 같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 스스로 내 감상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쓰레기에 감정이입할 사람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가끔 책이나 영화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저마다 감상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운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 느낌이 이상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유머포인트가 달랐다. 집중해서 보는 요소도 특이했다. 같은 내용에 집중하더라도 생각의 방향이 많이 달랐다. 특히 다수 의견과 괴리가 있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위화감이 들곤 했다. 보편적 해석을 내지 않는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정상이 아닌가? 왜 애들이랑 생각이 다르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점점 움츠러들고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눈치를 주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내 말이 무조건 옳고 네 말은 어쨌든 틀렸다는 식의 주장만 아니라면 모두의 감상이 다 존중받아 마땅하다. 시 한 편과 100명의 독자가 있다면 101편의 시가 있는 거다. 예술작품의 구조나 표현이 정형화 될 수는 있더라도 감상마저 획일화될 수는 없다. 내 생각이 남들과 다름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하다. 모두가 똑같은 감상평을 내놓는 작품은 세상에 없다. 나는 그 간단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지고지순한 짝사랑을 노래한 이 시는 온 국민의 연시(戀詩)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를 쓸 때 겨우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인은 그 나이에 벌써 사랑을 깨달았다. 시인의 고백은 순수하다. 그야말로 순정이다. 저 혼자 불타오르다 끝나는 흔한 짝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 집착도 아니다. 당신이 내게 눈 돌릴 때까지, 그대의 배경에서 하염없이 그대를 기다리겠다는 담담하고도 애틋한 선언이 바로 이 편지의 백미다. 18살 소년의 순수한 고백이 수많은 연인의 오작교가 돼주었으리라.


사랑을 모르는 나도 이 시를 읽으면 마치 사랑의 포로가 된 것만 같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기다림이 얼마나 즐거운 시간인지, 그리고 얼마나 꾸밈없는 행동인지 깨닫는다. 절절한 고백에 삭막한 내 연애세포가 핑크빛으로 물든다. 메마른 가슴이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하지만 그녀가 끝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언젠가 다시 눈이 퍼붓기를 기다리겠다는 시인의 자세가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사랑, 그것도 등 뒤에서 하는 사랑을 그려낸 이 시는 내게 시의 매력을 가르쳐준 첫 작품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편지가 다르게 보인다. 용기 내어 그대에게 전하는 연서(戀書)가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격려 편지로 읽힌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오던 사람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깃발을 향해서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깃발이 사라졌다. 방향을 착각해 길을 잃은 걸까? 아니, 어쩌면 그는 깃발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스로 다다른 깃발이 이 경주의 결승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깃발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 너머에는 깃발이 없다. 앞으로 어떡할지 막막해서 털썩 주저앉는다. 갈 길을 잃은 이에게 시인은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말이다.


한결같이 나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가족, 내가 힘들 때마다 옆에서 어깨를 빌려주는 친구, 매일 아침 꼬리를 흔들며 내 갈 길을 배웅해주는 강아지, 세상일이 괴로워 쓸쓸히 밖으로 나서는 날에 눈물짓듯 웃어주는 하얀 들꽃까지. 우리 주변에는 당연한, 배경같은 존재가 참 많다. 그리고 그들은 ‘사소’하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곧잘 밀리곤 한다. 우리는 부모님을 흔히 산소에 빗대곤 한다. 있을 땐 그 소중함을 모르지만 없고 난 후에야 가치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굳이 부모님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상이 모두 산소다. 우리는 산소 없이 살 수 없다.


인생은 5개의 공을 가지고 하는 저글링이라는 말이 있다. 나, 가족, 친구, 일, 건강이라는 5개의 공을 끊임없이 저글링 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저글링을 할 때는 모든 공에 동시에 신경을 쓰며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한 번에 공 하나만 컨트롤할 수는 없다. 계속해서 여러 공을 굴려야 한다. 모두 놓치지 않고 계속 저글링 하는게 가장 좋겠지만 인간이 그럴 수만은 없다. 쉬는 시간이 없어서 팔이 아플 수 있다. 바람이 세게 불어 균형을 잃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어떤 공을 놓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이 때가 중요하다. 공의 재질과 크기가 모두 똑같지는 않다. 어떤 공은 고무공이기에 떨구어도 튕겨 올라와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공은 유리공이라 한번 떨어트리면 영영 깨져버릴지 모른다. 고무공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유리공을 떨어트리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중요한 건 저글링을 잘, 빠르게, 화려하게 하는 게 아니다. 먼저 유리공과 고무공을 가려놔야 한다. 저글링 기술은 그 다음이다.


그간 깃발만 보고 달리느라 보지 못한 사소한 일을 돌아보자. 유리공인지 고무공인지도 모르고 치워놓은 공이 한가득일 테다. 이것들이 고무공인지, 유리공인지 먼저 구분해야 한다. 하나 하나 되돌아보다 보면 그간 고무공에만 집착하느라 유리공에 생긴 생채기들에 눈이 간다. 깨진 공도 더러 있다. 사소한 일들의 소중함과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어리석음을 깨닫는다. 그래도 다행히 성한 공이 더 많다. 정리를 마치고 앞을 보니 비로소 내가 걸어갈 새로운 길이 보인다. 드넓은 초원에 더 이상 깃발은 없다. 내가 앉아 있는 배경을 잊지만 않는다면 어디로 가든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     



그럼에도 여행이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매 순간 순간이 모두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이거나 망상가이다. 삶에는 분명 오르막이 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게 인생이다. 오르막에도 내리막에도 저마다 주의사항이 있다.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는 이와 기쁨에 취해 헤롱대는 사람 모두 새겨 들어야 할 금언이다.


봄이 되면 우리 집 앞에는 벚꽃이 예쁘게 핀다. 3월에 창밖으로 바라보는 벚꽃은 참 예쁘다. 4월이 되면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진다. 4월 중순쯤엔 꽃잎 하나 없이 봉우리만 남아 굉장히 흉하다.  5월엔 꽃잎 대신 나뭇잎이 돋는다. 새 옷을 입은 것 같다. 푸르른 그 모습도 분홍빛 못지 않은 매력이 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벚나무는 4월에 그랬듯이 옷을 훌훌 벗어던진다. 발치를 덮어주던 낙엽은 바람에 날려 온데 간데 없다. 결국 알몸으로 매서운 겨울을 버텨낸다. 눈이 녹으면 다시 분홍색 옷을 꺼내 입고 봄을 맞이한다. 벚나무는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다. 웬만한 인위적 요인이나 천재지변이 아니고서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다. 하지만 벚나무는 영원하지 않다. 수없이 많은 끝과 시작을 맞이할 뿐이다. 벚나무는 계절에 맞춰서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꾸어간다.  낙엽을 떨구지 않으면 벚꽃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둘러싼 배경은 계속해서 변한다. 정권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한다. 연필과 수첩 대신 휴대전화를 들고 다닌다. 사회적 배경뿐만 아니라 개인적 배경도 바뀐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내 수입이 변할 수도 있다. 여건에 따라 거주지나 직장을 옮기고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도 있다. 변화가 긍정적인 방향일지 부정적인 방향일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언젠가는 끝나고 다른 상항을 마주한다는 거다. 그럼 우리도 거기에 맞춰 준비를 해야 한다. 가을옷으로 겨울을 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초가을에 벌써 겨울옷을 꺼내서도 안된다.


겨울이 끝나면 봄이 온다. 곧 꽃이 지고 녹음이 우거진다. 시간이 지나 낙엽이 지면 다시금 차디찬 칼바람의 계절이다. ‘이 눈이 그치더라도 결국 다시 눈이 오겠지’, ‘이 봄도 언젠가는 허무하게 끝나겠지’하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전부를 아는 듯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봄을 기다리며 추운 겨울을 버티는 사람, 여름을 즐길 새도 없이 가을과 겨울을 대비하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만날 때에 떠남을 염려하는 사람이요 떠날 때에 다시 만남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는 알지만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사계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추운 겨울도 나름의 낭만과 가치가 있다. 봄도 마찬가지다. 꽃이 만개하는 것만이 봄은 아니다. 온 힘을 다하고 떨어지는 꽃잎에도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 힘겨운 순간도, 즐거운 순간도, 아쉬운 마지막도, 설레는 처음도 모두 내 삶이다. 값어치가 다르지 않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즐겨야 제대로 사는 삶이다. 봄의 절정만을 그리며 살면 행복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매 순간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갈 수 있을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답을 안다면 지금 이렇게 힘들지는 않겠지. 아마 지금쯤 종교를 만들지 않았을까. 시작을 내 이야기로 했으니 끝도 내 이야기로 맺어야겠다. 지난 일요일에 자해를 했다. 상처가 꽤 컸다. 흉이 남을 것 같다. 상담사는 경악하다시피 하며 나를 혼내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리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며 자살(그리고 자해) 방지 서약서를 쓰게 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렸나 싶어서 허탈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인생을 완전히 잘못 살아온 것만 같아서 허무했다. 이 정신적 고통이 언젠간 끝나기야 하겠지만 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절망감이 들었다.


상담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인간은 한 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더라구요. 잘 못 산 시간도 그 시간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요. 지금은 와닿지 않는 말일 거예요. 그래도 이렇게 믿고 한번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요.”

아리송했다. 알 것도 같지만 잘 모르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담사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상담을 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안건데요,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내가 힘들지만 거꾸로 보면 그 문제 때문에 내가 지금껏 살아온 거예요. 그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나를 살아오게 만드는 힘이예요. 이상하고, 잘못 살아온 것 같고, 헛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지 않은 점이 있고, 잘 살아온 순간이 있고, 가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어요. 상담은 내 문제를 살펴보고, 힘듦을 치유하고,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는 작업이예요. 그러니 이메다씨가 이 괴롭고 힘든 순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견뎌줄게요.”


매화의 아름다움은 꽃의 색이나 향이 아니다. 색이 예쁘고 향 좋은 꽃이라면 수도 없이 많다. 추운 겨울이면 모든 꽃이 움츠러든 채 날이 풀리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매화는 언 땅에서 홀로 꽃을 피워낸다. 새하얀 눈밭에 붉디 붉은 물감을 칠한다. 맑은 향으로 꽁꽁 언 세상을 녹여준다. 그래서 매화는 아름답다. 매화는 봄이 옴을 알리는 꽃이 아니다. 겨울이 피워낸 꽃이다. 겨울이 없더라면 매화의 아름다움도 없다. 그렇기에 겨울은 즐거운 계절이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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