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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Jun 19. 2020

그대는 가난의 얼굴을 아는가

<가난한 사랑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그대는 가난의 얼굴을 아는가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봤다. 길거리에서 주운 30만 원을 경찰서에 갖다 줘 주인 찾아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훈훈한 내용의 게시글이었지만 댓글은 그렇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두고 그래도 말이 심했다는 댓글부터 그런 인성이니까 파지나 줍고 살지 하는 식의 인신공격까지, 댓글 창이 온통 할아버지를 욕하는 말로 가득했다. 사실 게시글에는 할아버지가 어떤 어투와 태도로 얘기했는지 나와 있지 않은데 말이다. 할아버지의 의중을 작성자가 제 말투로 풀어놓았을 뿐이다.


할아버지가 무례한 태도로 은인에게 과한 말을 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할아버지를 향해 창을 던지고 있었다. 창을 던지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할아버지의 생각이 너무 각박하기는 했다. 정작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은 따로 있었다. “살기 힘들다보니 못 배워서 그런 거니 이해해주는게 속편함”, “곳간에서 인심난다잔냐ㅜ. 돈도없고 마음에 여유도 없는 불쌍한분인거지” 내가 가난에 자격지심이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대놓고 욕하는 댓글보다, 할아버지를 불쌍한 사람으로 여기는 댓글이 더욱 가슴 아팠다. 동등한 인간에게 느끼는 측은지심이 아니라, 한 수 아래의 무언가에게 건네는 동정이라 여겨졌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람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이 시를 읽고 남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너무 아팠다. 안타까움과 함께 슬픔이 밀어닥쳤다. 슬픔의 파도가 얼마나 셌는지, 내 몸과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감정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시를 한 편 읽었을 뿐인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난한 사람도 사람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 빈자(貧者)들도 감정을 느낀다. 외로움을 모르지 않고, 두려움이 없지 않으며, 그리움을 버리지 않았다. 사랑이 얼마나 달콤하고 따스한지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 당연한 감정과 소망을 버려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구린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기약 없이 접어두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 적어도 이 시의 화자는 쓰레기통이 아니라 소각장에 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마음 한편에 묻어놓고 살 수 없다. 묻어놓고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감정들이 빼꼼 고개를 들이밀 때가 있다. 꺼내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땅을 파고 나온 내 안의 바람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가난이라는 현실의 울타리가 마주하는 순간. 그 괴로움을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 그래서 가난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린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당연히 바래야 할 것을 포기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 될 마음을 가슴에서 털어낸다. 그렇게 현실이라는 명찰을 찬 가난 앞에 적응이라는 이름의 복종을 맹세한다.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안타까움이 먼저 출발하자 슬픔이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속도를 높여 걷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 자연히 가지는 본능적인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서럽다. 하지만 정말 내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건, 이 모든 것을 버리는 젊은이의 태도다. 사랑의 달콤함을 알면서도 동시에 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의 읊조림. 거기에는 체념이 담겨 있다. 이 악랄한 현실에 분노하거나 반항도 하지 못하고. 슬픔이라는 감정만 겨우 간직한 채 익숙한 듯 나머지 모든 것을 버린다. 젊은이도 처음부터 이렇게 순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다. 소리도 쳐봤고 반항도 해봤으리라. 하지만 젊은이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가난은 더 잔인한 고통을 선사했기에, 젊은이는 이제 눈물을 머금고 덤덤하게 자신의 마음을 비운다. 명절에 집에 놀러 온 사촌 동생에게 소중한 제 장난감을 빼앗기는 아이가 있다. 장난감을 잃어서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보다, 익숙한 듯 빠르게 포기하고 아무 말 없이 혼자 앉아 있는 아이가 더 슬퍼 보이는 까닭이다.



댓글을 쓰며 ‘가난하면 마음의 여유도 없다’며 할아버지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던 이들은 이런 가난의 민낯을 알기나 할까. 그들은 왜 가난한 자에게 여유가 없는지 그 속사정을 알까. 왜 젊은이는 자신을 사랑한다 속삭이던 여인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돌아서야 했는지. 왜 달빛이 새파랗게 쏟아지는 눈 쌓인 골목길을 홀로 걸어가야 했는지. 왜 두려움 속에서도 한밤에 길을 나서야 했는지. 집 뒤 감나무를 그리면서도 어머니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보지 못했는지. 아니, 알 필요 없겠지.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는 거겠지.


그들의 따뜻한 측은지심이 내게는 위에서 아랫것들을 내려다보며 내려주는 값싼 동정으로 비치는 까닭이다. 그들의 따뜻한 위로가 내 가슴에는 차가운 비수로 꽂히는 까닭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주변 곳곳에 자리 잡은 가난이라는 놈의 얼굴을 아는가.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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