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유성호
사람은 모두 죽는다. 진시황도 죽었고 아우구스투스도 죽었으며 박정희도 죽었다. 하나는 병으로 죽었고, 하나는 자연사했으며 하나는 심복에게 죽었다. 생명체라면 그게 무엇이든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의 가능성을 너무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보험을 들고 사고가 나지 않을 만한 안전한 제품을 사는데 몰두하지만 정작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는 기피한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너무 엄숙하고 무겁게 다뤄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의 현실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그런 경향을 깨고 죽음을 마주하게 해 준다.
책은 크게 6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법의학, 생명체의 기준(삶의 시작), 존엄사, 자살, 죽음 준비(또는 선택), 영생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의 법의학이나 생명체 논쟁은 참 재미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이라면 열광하면서 볼만한 부분이며 내가 탐정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존엄사와 자살, 죽음 준비 파트에서도 죽음에 관한 자기결정권이 정말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지게 된다. 여기는 재미도 있지만 스스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영생은 곁다리로 껴 있는 부분인데 죽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될 듯하다.
300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책이라 내용이 풍부하지는 않다. 하지만 문장이 깔끔해서 이해하기 쉽고 재밌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만하다. 또 지식의 내용이 적은 대신, 스스로 생각해볼 만한 문제제기가 많다. 매 부분마다 책을 덮은 채 질문을 음미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 읽고 난 지금은 돈값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존엄사와 자살 부분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먼저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존엄사(혹은 안락사)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연명의료 보류 중지다. 지금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합법된 안락사다. 법안은 2016년에 통과됐는데, 통과 계기가 된 사건은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과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이다. 서울 보라매병원 사건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만 주제와 큰 관련은 없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은 직접 찾아보기를 권한다. 연명치료 중지는 아무 사람이나 치료를 중지하는 게 아니라, 의학적으로 더 이상 치료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의사조력자살이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미국 일부 주가 시행 중이다. 이는 병원에서 죽을 수 있는 기계나 장치를 설치해주되, 직접 죽음의 버튼을 누르는 것은 자살자 본인인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서 세 번째는 적극적 안락사인데 이는 환자의 마지막 의사를 듣고 의사가 대신해서 죽음의 버튼을 눌러준다. 여기서 재미있는 조사가 하나 있는데, 미국의 의사조력자살이 허용된 주에서 전체의 40%는 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하면서 마지막까지 죽음의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적극적 안락사가 시행됐다면 죽었을 사람들 4명을 의사조력자살에서 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죽음을 향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 적다는 말도 된다.
비슷한 주제는 자살이다. 우리나라의 타살자는 10만 명 당 0.8명에 불과하지만, 자살자는 24명에 달한다. 노인 자살자 비율에 관한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자살이 중요한 사회 문제임은 확실하다. 자살에 대한 시각은 다양하다. 정신과에서는 모두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하는 '생명에 관한 자기결정권'으로서 보장돼야 한다는 말도 있고 죽음을 국가와 사회의 압제, 개인적 불행으로부터 해방되는 행위로 보기도 한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여론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맞춰서 자살 방지 캠페인을 '나라가 세금을 더 많이 받으려고 사람들 죽는 것을 막는다'는 식의 국가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내가 감히 생각하건대, 의사 조력자살과 적극적 안락사를 포함한 모든 자살은 있어서는 안 된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고 관계의 타살이며 정신과적 질환의 증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고 임세원 교수의 책 제목처럼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많은 의사들의 경험담이기도 하며, 자살시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늘 나오는 이야기다.
삶은 항상 옳고, 죽고 싶다는 생각은 벼랑 끝에 몰려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는 이들의 착각이다. 죽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착각, 고통에서 해방되리라는 착각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선택한다. 자살은 삶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더 이상 삶의 개선을 바랄 수 없어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의 살려달라는 절규다. 세상에 자살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정신과적 질환이자 망상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살방지 캠페인이 있다. 이는 국가의 자원을 낭비시키지 않으려는 착취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외침을 듣고 연민의 감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들의 순수한 도움의 손길이다.
자살을 생명에 관한 자기결정권으로서 존중해달라는 말도 요즘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간다. 이는 자연인으로서 당연히 얻는 권리이다. 현실적 제약 때문에 완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는 없지만 우리는 분명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자유와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자유와 선택이라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도 우리의 삶 자체다. 매 순간 자유를 누리며 그 대가로 삶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다. 삶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내 선택권이 아무리 제약됐고 아무리 결과가 불합리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자유의지를 누리는 것에 대응되는 책임이다. 만약 자살을 자기결정권으로 인정한다면, 그 권리를 책임지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생긴다.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책임질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모든 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은 주변인과 국가가 떠안는다. 살아생전의 많은 문제는 가족에게 다시 돌아갈 뿐이고 죽음에 따른 고통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자살권은 이기적이고 책임 없는 방종이기에 반드시 제약돼야 하는 기본권이며,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인정되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