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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Feb 13. 2021

난 몰랐어. 그게 너의 죄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값싼 기계 취급을 받았어, 인간이."
"난 오빠의 그 말을 모르겠어."
힘없이 경애가 말했다.
"알게 될 거야."
윤호가 일어서려고 하자
"싫어, 오빠!"
경애가 소리쳤다.
(……)
"난 몰랐어."
경애가 말했다.
"그게 너의 죄야."
윤호가 말했다.
“그게 모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죄야. (……)” (176)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가 쓴 연작소설이다. 각 장마다 서술자가 바뀌어서 처음엔 조금 혼란스럽다. 그래도 어려운 책은 아니다. 쉽고 잘 읽힌다. 구성상 모든 등장인물은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다. 주된 이야기는 서울 달동네에서 쫓겨난 난장이와 그 일가(부인, 큰아들, 작은 아들, 막내딸)의 처절한 삶이다. 중간중간에 노동운동가, 중산층 대학생들, 자본가의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이 소설은 1970년대의 암울한 노동자들의 처우와 삶을 그려낸 대한민국의 아픈 자화상이다. 아픈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인 까닭은, 난쏘공은 2020년대의 대한민국의 자화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읽은 직후에는 하나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슬픔. 한 대목 한 대목, 가슴 아려 죽을 것 같았다. 조세희의 문장인지 1970년의 대한민국인지, 아니면 2021년의 대한민국인지 모를 무언가가 내 가슴을 푹푹 찔러댔다. 여공들은 옷핀에 찔려 피를 흘리며 새벽까지 일을 했다는데, 피는 커녕 눈물조차 나지 않는 내 눈물샘이 너무나도 미워서 펑펑 울었다.


이 책을 읽고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사람이다. 이 책을 읽고 논리와 이성으로 입씨름을 하려는 자는 가엾은 사람이다. 세상을 사랑할 줄 모르는, 따라서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 책은 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먼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격앙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펜을 잡는다.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마저 쓴다.


이 책을 관통하는 단어는 몰랐다이다. 이 단어는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작하며 인용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중산층 대학생인 윤호는 거짓말로 자기를 꼬드긴 은강 그룹의 딸 경애에게 윽박지르듯 이야기한다. “값싼 기계 취급을 받았어, 인간이.” 은강 그룹은 난장이네 아들 딸이 일하는 회사의 이름이다. 은강 그룹의 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는 근무 환경 속에서 말도 안 되는 근무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업무 강도로 노동한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보수를 받는다. 윤호는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17살짜리 경애에게 화를 낸다. 그러자 경애는 대답한다. “난 몰랐어.” 윤호는 차갑게 답한다. “그게 너의 죄야.” 17살짜리 재벌집 아이가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몰랐다는 사실을 윤호는 죄라고 말한다.


몰랐다는 말은 다른 장면에서 또 등장한다. 알류미늄 전극 제조 공장의 열처리 탱크가 폭발해서 수많은 사람이 죽는다. 하루에 천삼백 원을 받고 일하던 직원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린다. 남편을 잃은 어린 신부는 뱃속에 아이를 품은 채 목을 맨다. 그럼에도 공장은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정수장을 거치지 않고 폐수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노동조합 지부장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 가 돌려보내지 않으며, 삼십여 명의 직원을 무단으로 해고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악덕 회사다.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배를 탄 사람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우리의 열 배 이상의 돈을 받았다. 저녁 때 그들은 공업 지대에서 먼 깨끗한 주택가,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따뜻한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몰랐다. (220)     


그들은 몰랐다. 노동자들의 삶을 몰랐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삶을 꿈꾸는지 몰랐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은 “우리”와 “그들”이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다.   

  

난장이네 삼 남매의 첫째 영수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벽에 부딪힌다. 그는 이리저리 방책을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결정을 한다. 아니, 어쩌면 결정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영수는 은강 그룹의 회장을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용케도 그의 자택에 숨어들어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나, 회장의 동생을 회장으로 착각해버렸다. 영수는 꿈도 이루지 못한 채, 피고인의 옷을 입은 채 재판장에 선다.


이 대목에서 서술자는 회장의 셋째 아들로 옮겨간다. 회장의 셋째 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재벌이다. 그는 공장원들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직원들이 자기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 원리에 따라 자기네 회사를 선택한 건 노동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는 논리다.


변호인의 반대 신문에 의한 피고인의 진술을 들어보면 은강 공장 근로자들의 이마에서 땀을 짜낸 사람, 그들의 심신을 피로하게 한 사람, 결국 그들을 불행하게 한 사람은 바로 우리였다. 변호인의 물음 하나하나가 피고인의 행동을 정당화시켜주기 위해 던져지는 것으로 나에게는 들렸다.(287)
그들은 우리가 남다른 노력과 자본·경영·경쟁·독점을 통해 누리는 생존을 공박하고, 저희들은 무서운 독물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간다고 단정했다. 그 중독 독물이 설혹 가난이라 하고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했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저희 자유 의사에 따라 은강 공장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마음대로 공장 일을 놓고 떠날 수가 있었다. 공장 일을 하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그런데도 찡그린 얼굴을 펴본 적이 없다.(289)     


그는 언뜻 보면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의 편에 서서 충분히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에게 결여된 것은 남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자세였다. 그래서 공장 직원들도 자기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인 줄 몰랐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벌레를 보고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에겐 할 수 없는 짓을 한다. 그도 공장 직원들을 자기와 동등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사정을 몰랐고, 알려하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람이 아닌 것처럼 대했다. 그 모름은 칼날이 되어 노동자들의 몸과 마음 곳곳을 난도질해놓았고, 칼날은 다시 돌아와 회장의 동생의 가슴팍에 꽂혀버렸다.


비극이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기에 대화나 협상이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 대화나 협상 다음은 전쟁뿐이다. 누군가가 죽고 피 흘리고 다치는 싸움밖에는 없다. 무지는 서로의 대화와 소통의 기회를 앗아간다는 점에서 분명 비극이다. 정확하게는,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자세가 바로 비극이다. 그리고 경애는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애의 “난 몰랐어.” 하는 말은 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일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난쏘공처럼 열악한 처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고, 회사의 압력에 굴복해 부당한 처우를 받으며 사는 직장인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바로 갈등이다.


요즘은 정치만이 갈등의 주제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갈등, 인터넷 커뮤니티 간의 갈등 등 다양하다. 나는 이 시대를 혐오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수많은 혐오가 즐비한 세상이다.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은 모두 남이고, 적이고, 벌레가 되는 세상이다. 수많은 혐오의 안에는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이 내포돼 있다. 내 말은 늘 맞는 말이고, 나는 늘 상대보다 높은 존재니까 당연히 “틀린” 상대방을 이해할 가치가 없는 게다. 나와 동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대화할 가치도 없다. 상대의 말에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 욕설과 혐오를 일삼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라 생각한다.


갈등은 당연한 현상이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적인 곳이리라. 갈등이 없는 세상은 독재사회 말고는 없다. 하지만 갈등에도 격이 있다. 서로 대화하고 타협할 수 있는 갈등과 서로를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갈등이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나라의 갈등은 대다수 후자의 갈등인 것만 같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는 알려하지 않는다.     


"모르면 공부하세요!"


이 "모르면 공부하세요" 짤들은 서로 대화할 자세가 돼있지 않다. 서로는 그냥 모르면 배우라는 식으로 대화를 일축한다. 마지막 짤방은 순수한 질문에 "모르면 배우라!"는 식으로 소통을 거부한 케이스이지만, 가운데 짤방은 질문자부터가 시비를 걸기 위해서 물어본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특히 인터넷 속에서의 혐오 문제의 본질을 이 사진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귀를 막고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 식의 싸움을 시작하면 답이 없다. 내가 모르면 배우려는 자세로, 상대가 모르면 알려주려는 자세로 서로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인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갈등 해결의 필요조건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대화를 해야만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너와 다른 생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너와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해질 것이다. 난장이의 아버지가 꿈꾸는, 그리고 난장이 가족의 장남 영수가 꿈꾸는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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