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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Feb 06. 2021

우울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슬픔의 위안>

신형철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자기가 읽은 최고의 논픽션이라길래 빌려 읽어봤다. (그런데 사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다 못 읽고 책을 덮었다.) 신형철의 극찬처럼 최고의 논픽션인가 싶기는 하지만, 좋은 글이라는 생각은 든다. 특히 슬픔과는 가까운 사이인 나이기에, 더 쉽게 읽어나갔던 것 같다.


<슬픔의 위안>은 사별한 사람들을 위해 쓰인 책이다. 부모, 자식, 친구, 연인 등 사랑하는 이들을 테러, 살인, 사고 등으로 너무 이른 시기에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들은 “우리는 슬픔에 관한 책을 쓰는 중입니다”라고 자기네의 글을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이 책은 사별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전반적인 슬픔에 대해서도 통용되는 책이다. 이별의 슬픔이든, 실패의 슬픔이든, 병환으로서의 슬픔이든 말이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이름은 차례대로 “슬픔에 맞닥뜨리다”, “슬픔에 빠지다”, “슬픔에서 빠져나오다”, “슬픔의 흔적이 남다”. 챕터마다 “무거움”, “신뢰”, “자연”, “종교” 따위의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이야기가 나온다. 총 29 꼭지다. 책은 슬픔의 시작부터 그 의미, 그리고 슬픔에 빠진 이들이 어떤 상황을 겪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위안을 얻고 힘을 얻어서 슬픔을 빠져나오는지 차례대로 이야기한다. 이 모든 상황을 자기들이 조사한 슬픔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학작품으로 엮어낸다. 여느 파스텔톤 에세이와는 다르게 문학적이며 여느 정신의학이나 심리학 서적과는 달리 친절하고 쉽다. 그래서 더욱 위안이 되는 책이다.


오늘은 책에서 나왔던 문장을 조금 따와서, 내 친구들이 내게 해줬으면 하는 일들을 적어가려고 한다. 내 사고방식이 어떤지 적어보려고 한다. 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슬픔에서 구해내고, 슬픔과 맞닥뜨린 자기 자신을 잘 도닥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11 (신뢰)

"남에게 밧줄을 던져줄 때는 반드시 한쪽 끝을 잡고 있어라."

우리는 비탄에 빠져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 표현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 심리학자가 즉석에서 한 이 말이 우리에게는 경험칙이 되었다. 의미는 단순하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슬픔에 빠진 누군가에게 입증할 수 없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녀는 더 좋은 곳으로 갔어요"라고 한다면, 이때 이 사람은 이 밧줄의 반대쪽 끝을 잡고 있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갔는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라고 한다면 이 사람 역시 붙잡을 수 없는 밧줄을 던지는 것이다. 스스로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괜찮을 거예요"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에 "당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어요"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이다. 누군가가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으리라 믿고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다. "밤새도록 휴대전화를 쥐고 있을게요. 당신 전화번호가 뜨면 언제라도 받을게요"라고 말해준다면 한결 더 낫다. 이는 그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뢰해도 되는 밧줄인 것이다.     


우울에 빠진 이의 사고 회로는 부정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돌아간다. 반쯤 찬 물컵을 보고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 하는 게 아니라, 가득 찬 물컵을 보고 “어차피 저 물도 곧 다 사라질 거니까, 없는 거나 다름없어.”하는 식이다. 눈이 녹고 봄이 올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슬픔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100명보다 자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 1명에 집중하며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게 만드는 것이 우울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거기에서 꺼내 주고 싶다면, 그냥 있어줬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노력, 그 노력은 당신의 사랑을 쉽사리 우울에서 꺼내오지 못할 것이다. 해도 해도 안 되는 노력은 절망으로 다가오기에, 그래서 내게서 멀어지는 당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절망스러운 것은 없기에,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약속 하나만 하고 그 약속만 지켜줬으면 좋겠다.     


52 (낙인)

그 가을, 패넌트레이스 중이던 뉴욕 양키스 선수들은 뉴욕주를 위해 작은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몇몇 선수들이 주방위군 지휘본부를 찾아가 희생자 가족과 함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선수들은 긴장했다. 어느 스포츠 담당 기자가 설명한 대로 그들은 "자신들이 마주하게 될 사람들 대부분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거나, 사고가 난 지 닷새나 지났는데도 사랑하는 이가 참사 현장에서 살아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토레가 회상에 잠겼다. "그때 한 가족이 우리를 쳐다봤는데, 좀 더 가까이 와달라는 눈빛이더군요. 제일 먼저 다가간 건 올스타 외야수 버니 윌리엄스였죠. 버니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더듬거리던 게 기억에 나는 군요." 윌리엄스가 어렵게 꺼낸 말은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안아드려야 할 것 같군요"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구들의 행동이 아니다. 친구들의 위로가 아니고, 친구들의 조언이 아니고, 친구들의 충고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날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내가 죽으면 네가 많이 슬플 거라고. 넌 충분히 많이 나아지고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느니, 명상을 하라느니, 마음을 편히 먹으라느니, 불안을 내려놓으라느니 하는 식의 충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안다. 모를 리 없다. 많은 시간 동안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서적을 탐구하고 유튜브를 돌아다니면서 병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치료법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들이 안다고 되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친구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말들은 나를 자극한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그걸 왜 안 해?”라는 식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충고나 조언은 감사하나 나의 자책을 강화하는 트리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인용한 위의 말처럼, 그냥 옆에 있어줘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곤란함을 솔직히 표현하라. 그것이 그 어떤 충고나 조언보다도 따뜻한 위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슬픔이라는 놈을 잘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의 주변에 만연한 슬픔을 자연스레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자신의 슬픔이든 타인의 슬픔이든 말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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