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었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허나 한 세월 살다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그렁 고여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 깨치는 것이 순리라지만, 그러기엔 우리 삶이, 특히 우리 청춘이 너무 짧고 또 아깝습니다. 해서, 한동안 저는 젊은 제자들을 위해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그들과 함께 그 글들을 나눠 왔습니다. 그들은 의학, 법학, 경영학, 공학 등을 전공하는, 대부분 이미 시를 잊은 젊은이, 아니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아예 배워보지도 못한 젊은이, 그리하여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 빼앗긴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건만, 고백건대 시에 대한 강고한 장벽을 치고 살아온 그들의 틈을 뚫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인스턴트에 길들여진 그들에게 시의 깊은 맛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했습니다. 가요와 가곡, 그림과 사진, 영화와 광고 등 다양한 재료와 스토리에 시를 버무린 일종의 퓨전 음식이라 할까. 그것을 어떤 날은 살짝 추억에 담갔다가 또 어느 날은 역사와 철학에 곁들여 음미해 보도록 하는 거였습니다.
- 책 5-6쪽(머리말)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햐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의 “눈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피천득, <순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