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메다 Aug 20. 2020

비로소, 시를 읽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정재찬

학창시절 시(詩)의 추억

국어는 내게 가장 쉬운 과목이었다. 투입 대비 결과가 가장 잘 나오는 과목이었다.


수능 국어는 크게 문학과 비문학(독서)로 나뉜다. 나는 비문학보다 문학이 쉬웠다. 특별한 문제풀이 방법은 없었다. 글을 읽고 이해해서 문제를 푸는 타입이었다.(요즘 사람들이 보면 이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싶겠지만, 요즘은 문제를 푸는 각종 스킬이 많다.) 그래서 글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생소한 과학지문이나 기술지문은 그림을 그려가며 풀어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수능날에 틀린 문제도 기술지문이었다. 반면에 문학은 쭉 읽고 보기를 보면 답이 보였다.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나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시가 짧아서 빠르게 풀었다. 작품 속 상황이 어떤 분위기인지, 단어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지를 보면 답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그래서 문제 풀 때는 시를 빠르게 처리하고 난 다음에 생소한 비문학 지문에 온 신경을 집중했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시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소설이야 혼자서도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시를 읽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문제에는 보기와 선지가 있었다. 시를 읽고 그것들을 보면 이 시가 어떤 분위기인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답이 보인다고해서 심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지는 않았다. 내가 파악한 시는 동영상이라기보다는 설명문에 가까웠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이 시의 저자는 참여시인 김수영이다. 따라서 바람은 풀을 억압하는 독재정권일 것이다.”하는 안내방송만 왱왱 울리는 듯 했다. 시를 읽고, 답을 찾고, 분석까지 다 했다. 시어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다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시인의 이야기와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문제 풀 때가 아니라, 나 혼자 시를 볼 때면 수업시간에 배운 것처럼 분석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공감이나 이해는 당연히 못했다. 막막했다.


그래도 시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나도 시를 써보고 싶다는 바람,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어울리는 시를 한 편 읊고 싶다는 로망. 하지만 그건 ‘시가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생긴 허세였다. 시를 온전히 문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려운 무언가, 젠 채 할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했다. 그러니 시를 즐겁게 읽을 턱이 있나. 학년이 올라가며 더 어려운 시들을 공부하고 많은 문제를 풀었다. 웬만한 문제는 다 쉽게 맞췄다. 그럴수록 시와는 점점 더 멀어졌다. 참 아이러니하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말합니다.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들이야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고. 듣기엔 꽤 멋진 말이었지만, 아등바등 살아도 모자란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면서 잊고 지냈을 겁니다. 그땐 다들 청춘이었으니까요. 허나 한 세월 살다보면,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문득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오게 마련입디다. 채울 틈조차 없이 살았던 내 삶의 헛헛한 빈틈들이 마냥 단단한 줄만 알았던 내 삶의 성벽들을 간단히 무너트리는 그런 날, 그때가 되면 누구나 허우룩하게 묻곤 합니다. 사는 게 뭐 이러냐고. 그래요,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차피 잊히지가 않는 법, 잊은 줄 알았다가도 잊혔다 믿었다가도, 그렁그렁 고여온 그리움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오고, 그러면 그제야 비로소 인정하게 되는 겁니다.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 깨치는 것이 순리라지만, 그러기엔 우리 삶이, 특히 우리 청춘이 너무 짧고 또 아깝습니다. 해서, 한동안 저는 젊은 제자들을 위해 시와 아름다움과 낭만과 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그들과 함께 그 글들을 나눠 왔습니다. 그들은 의학, 법학, 경영학, 공학 등을 전공하는, 대부분 이미 시를 잊은 젊은이, 아니 시를 사랑하는 법을 아예 배워보지도 못한 젊은이, 그리하여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 빼앗긴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건만, 고백건대 시에 대한 강고한 장벽을 치고 살아온 그들의 틈을 뚫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인스턴트에 길들여진 그들에게 시의 깊은 맛을 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레시피가 필요했습니다. 가요와 가곡, 그림과 사진, 영화와 광고 등 다양한 재료와 스토리에 시를 버무린 일종의 퓨전 음식이라 할까. 그것을 어떤 날은 살짝 추억에 담갔다가 또 어느 날은 역사와 철학에 곁들여 음미해 보도록 하는 거였습니다.

- 책 5-6쪽(머리말)     

저자의 말보다 더 나은 소개문이 있을까? 위에 소개한 글은 이 책의 머리말이다. 이 책을 왜 펴냈는지, 시를 어떤 방식으로 소개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책은 사랑, 별[star], 이별, 슬픔 등 12개의 이야기를 46편의 시로 풀어낸다. 그다지 어려운 시들은 아니다. 어림잡아 반절이 넘는 시는 교과서에서 봤던 작품이다. 저자는 이 시들을 사진, 영화, 광고, 시인에 대한 배경지식, 본인의 경험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쉽게 설명한다. 정재찬이 설명하는 시는 학창시절에 본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나는 참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읽은 <시를 잊은 그대에게>

공감가는 대목도 그렇지 않은 대목도, 저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읽히는 구절도 있었다. 어느 부분이나 즐겁게 읽었다.


전에 올렸던 “그대는 가난의 얼굴을 아는가”나 ”힘겨운 오늘, 그리고“라는 글은 모두 이 책을 읽으며 한 생각이다.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읽으며 나 역시도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하고 싶은 무언가를 포기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는 짝사랑을 주제로 한 시이지만, 그 시의 몇몇 구절이 내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왔다.


눈을 주제로 한 장(11장)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부산 사람이다. 눈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내 기억에 눈이라고 할만한 눈이 내린 건 세 번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눈이 주는 느낌을 잘 모른다. 고요한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하얀 눈발이 휘날리는 모습. 온 도시가 하얀 눈이라는 포근한 이불을 덮고 잠에 드는 모습. 작업에 집중하다가 마당에 쌓인 눈에 눈부셔하는 모습은 내게는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눈이 오지 않는 도시에 사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처럼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본 기분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내용을 주제로 한 시라고 해서, 모두 눈에 관한 이야기들처럼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좋은 술을 두고두고 꺼내 마시는 기쁨만큼이나 새 술을 맛보는 설레임도 달다. 나는 짝사랑을 해본 적이 없지만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덕에 짝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시 한 편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내가 몇 년간 짝사랑을 해본 느낌이 들었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읽고 기다림이 얼마나 설레고 의미 있는 시간인지 다시 생각해봤다. 이제는 누군가를 기다릴 때 재촉전화를 하거나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죽이지 않는다. 온전히 기다리는 시간의 설렘과 두근거림을 만끽한다.


시는 아는 만큼 다르게 보인다. 경험이 깊고 다양할수록 시를 진하게 음미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가 원숙한 중장년층만의 취밋거리도 아니다. 파릇파릇한 젊은이도 제 나름 레시피로 시를 요리해 맛볼 수 있다. 또는 시를 읽고 그간 모르던 맛에 새로이 빠질 수도 있다.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경험이 진짜 시의 맛일지 모른다.    

 


시 읽기의 즐거움

시는 가장 조용하고 변함없는 벗이다. 시는 실의에 빠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준다. 지독한 외로움에 텅 빈 느낌이 들 때, 시는 기대라며 조용히 제 어깨를 내민다. 기쁜 일이 있으면 마치 제 일인 양 웃고 즐거워한다. 용기를 잃고 주저앉아 있으면 조심스레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사랑할 때나, 화날 때나, 인생의 모든 순간에 시는 우리 곁에 있다. 이렇게나 좋은 친구를 멀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 읽기는 재미있다. 즐겁다. 다른 이유는 그 다음이다. 위로받기 위해서? 삶의 교훈을 얻으려고? 다 시의 기능이고, 시를 읽는 좋은 이유다. 하지만 그냥 좋아서 읽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는 없다.


나는 어린 시절에 책을 참 좋아했다. 집에 컴퓨터도 있었고 밖에 나가면 친구들도 있었지만  방에서 책 읽는 게 제일 좋았다. 요즘 사람들이 휴대폰을 보며 밥을 먹듯이 식사시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떤 날은 책을 보며 학교에 가다가 “니 그래 책 보면서 걸으면은 사시된다!”며 학생부 선생님에게 혼나기도 했다. 그랬던 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점점 책과 멀어졌다. 독서가 부담스러워졌다. 아, 그때도 여전히 독서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환경과 내 태도가 달라졌다.


주변인들은 책을 읽는 나를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나, 책을 읽고 싶어서 읽는다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거 생기부에 올리려고 읽나? 벌써부터 학생부 관리한다고 고생하네,”, “야 그 책 어렵던데, 니가 그거 읽어서 얻어가는 게 있냐?”하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그냥 재미있어서 책을 읽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점차 나도 책은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기 위해, 또는 입시를 위해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독서가 거북스러웠다. 이제는 사서 쌓아두기만 하고 잘 읽지는 않는다. 책을 살 때는 아, 이것도 읽어야지. 이거 참 재밌겠다! 하는 생각에 설렌다. 허나 정작 책을 집어들고 책상에 앉으면 부담감이 몰려와 읽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내가 원래 책을 읽던 이유는 ‘그냥’ 좋아서였다. 난 언제부터 독서의 즐거움을 잊어버렸을까.


시도 마찬가지다. ‘그냥’이 아닌 다른 이유가 들어가면 아무리 즐겁던 일이라도 수행해야 하는 과제로 변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이 되면 즐겁지 않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그러니 그냥 좋아서 읽어야 한다. 시를 읽고 시의 장면을 떠올리고.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에 잠겨도 보고. 평소에는 일상의 배경으로 지나치던 것들을 새삼스래 바라보기도 하고. 시인의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시를 읽는 시간은 참 즐겁고도 특별한 시간이다. 피천득의 수필 하나 소개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려 한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햐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도연명을 읽은 뒤에 국화를 더 좋아하게 되고 워즈워스의 시를 왼 뒤에 수선화를 더 아끼게 되었다. 운곡의 “눈맞아 휘어진 대”를 알기에 대나무를 다시 보게 되고, 백화나무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은 시인 프로스트를 안 후부터이다.
피천득, <순례> 중
매거진의 이전글 내 삶 되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