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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Jul 30. 2020

박준형 딸이 인생 2회차라고?

그저 불쌍할 뿐

커뮤니티에 "인생 2회차 박준형 딸이 생각하는 공부"라는 글이 올라왔다. JTBC의 예능프로그램인 <1호가 될순없어>라는 프로그램의 캡처 화면이다. 나는 TV 방송을 보지 않고 이 캡처 화면만으로 아래의 글을 써 내려갔다는 점을 양해해줬으면 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김지혜와 박준형은 자녀들에게 학원이나 숙제가 너무 많지 않으냐, 공부하느라 힘들지 않으냐며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두 아이는 힘들거나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며 화답한다. 나름 성숙해 보이는 문답에 네티즌들은 '인생 2회차', '이래서 환경이 중요하다. 괜히 부잣집 애들이 공부 잘하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글쎄올시다?


주옥같은 명언..?


내가 부모인데 자식에게 저런 말을 듣는다? 뿌듯하다, 아이고 우리 애기 다 컸네~ 하기보다는 그냥 슬플 것 같다.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일 테다. 어찌 슬프지 않은가? 주변에서 하니까 눈치 보이지 않으려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 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12살), 중학생(14살) 자식 입에서 나올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불쌍하다. 또 불쌍하다. 내 아이가 저런 말을 한다면 한참을 끌어안고 울며 속상해할 것 같다.


나는 22살 남자 대학생이다. 사범대서 역사교육을 전공하고 있고, 아직 미필이다. 혹자는 '니가 어려서 세상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내 아이'가 생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솔직히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섬도 청명하게 보이던 눈이 내 자식만 보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질지도 모른다. 나도 아버지가 된다면 저런 말을 듣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 이성은 저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철이 들었다. 분명 철이 든 아이다. 하지만 성숙하지는 못하다. 설익었다. 그래서 더욱 불쌍하다. 저 아이들은 열매가 익기는커녕 이제 막 꽃이 떨어지고 열매를 맺을 시기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들을 그렇게 순리에 맞게 자라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이들은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힘든데, 힘든데 할만하다고 한다. 그래, 그건 그럴 수 있다. 원래 세상 일이란 그런 거니까. 그런데 공부가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고 한다. 대체 왜? 왜 공부를 하지 않는 게 양심에 찔리는가? 왜 우리는 남들 다 하니까, 눈치 보이지 않으려고 공부를 하는가? 그걸 공부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고 싶어서 즐거워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또는 내가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주변 사람들 보면 다 하니까 책을 펼친단다. 주변에 비교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내 양심이 찔려서 문제를 푼단다. 공부는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공부는 교육이 아니라 훈련에 불과하다. 적어도 저런 생각은 고등학생, 대학생이 할 생각이지 10대 초반 어린이가 할 생각은 아니다. 마음껏 친구들과 뛰놀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교육철학 교과서의 제일 앞부분에서는 교육 개념을 정의하고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교육목적은 일반적으로 내재적 교육목적과 외재적 교육목적으로 나뉜다. 내재적 가치란 외재적 가치와 달리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교육이 대학 입학 수단으로써 가치 있다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배우고 학습하는 것 자체가 교육의 목적이다. 피터스라는 교육철학자는 이런 교육 본연의 가치가 지식, 이해, 인지적 안목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외재적 교육목적은 교육을 수단으로 삼아 교육활동 밖에 있는 어떤 가치(외재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교육이 그 자체로 존중받기보다는 사회적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육이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교육 본연의 가치가 가장 우선돼야 한다.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된 공부의 의미는 더 이상 지식을 습득하고 통찰을 얻는 것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높은 성과를 얻어내는 것만이 공부의 의미가 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호기심을 충족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한다. 되려 목적이 있을 때만 억지로 공부를 하게 되고, 그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다시금 책을 멀리 한다.


이런 경우 공부의 가치뿐만 아니라 방법도 문제가 된다. 성과를 내기 위해 교육이 아니라 문제 풀이 훈련을 하는 게 오늘날 통용되는 '공부'의 개념이다. 이건 사실 공부가 아니라 훈련이다.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빠르고 효율적으로 풀어내는가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문제풀이 훈련은 학생들의 창의력이나 사고력, 이해력, 인지적 안목을 키워줄 수 없다. 제한된 기술이나 사고방식을 길러줄 뿐이다. 이런 공부를 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행복할 수 없다. 성공이야 할 수 있다. 돈 많이 벌 수 있겠지. 하지만 성공해서 돈 많이 벌면 뭐하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면 뭐하나. 내게 인생을 더 잘 살아갈 지혜가 없는 것을. 내가 뭘 하면 행복한지 모르는 것을.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일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가 아닌 무색무취한 '군중의 일원'이 될 뿐이다. '나'를 잃어버린 대신 돈과 명예를 얻은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걸 내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훗날 오늘의 고민을 되돌아보고 "그땐 내가 어려서 세상을 잘 몰랐지"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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