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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Sep 25. 2020

카페에서 한 잡생각들

주제 없는 중구난방. 누가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랴

  우리 집 앞에는 카페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내가 이사 오기도 전부터 이 동네에 자리 잡고 있던 이디야 커피다. 다른 하나는 최근에 생긴 하삼동 커피다. 생긴 지 채 2달도 안 돼 따끈따끈하다. 두 카페의 주 이용자는 확연히 다르다. 이디야는 조용하고 차분하다. 그래서 노트북이나 책을 들고 와서 한동안 자리를 차지하는 손님이 많다. 나도 여기에 속한다.


  반면 하삼동은 활력이 넘친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손님이 자주 찾는다. 배경음악을 들을 틈이 없다. 가게 크기가 이디야보다 훨씬 작아서인지, 고객은 이디야가 더 많지만 장사는 하삼동이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 북적북적한 가게를 보고 있자면 기분 좋은 날은 나도 모르게 기운이 난다. 울적하거나 예민한 날에는 ‘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아서 저리 웃을까?’하는 괜한 심술이 올라온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생각해본 일이 있다. 가격과 시설 차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디야는 가장 싼 아메리카노가 3,200원이지만 하삼동은 1,500원이다. 라테 같은 메뉴를 시켜도 2,500원에 불과하니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다. 더 큰 차이는 시설이다. 이디야에는 와이파이가 있다. 모든 자리에 구비돼있진 않지만 어쨌든 콘센트도 있다. 반면 하삼동은 와이파이도 콘센트도 없으니 노트북을 들고 찾을 유인이 없다. 그래서 소위 카공족은 이디야를 찾는다.


  자연스레 이디야는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이용자층이 갈리기 시작하니 대화를 원하는 이들은 하삼동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찾는 이들은 이디야로 이끌린다. 나만 해도 그렇다. 오늘은 500원 동전 5개로 오후를 보내겠노라 다짐하지만 길 건너에서도 느껴지는 시끌벅적함에 발길을 돌리게 된다. 오늘 이 글을 이디야에서 쓰는 까닭이다. 그래도 카푸치노는 하삼동이 맛있다. 아이스는 더더욱.     


맛있는 카푸치노 아이스

  서울에 다녀오고(링크) 몇 주는 카페에 가지 않았다. 게릴라 전투를 벌이던 코로나 군(軍)이 다시 전면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 외에는 삽짝 밖을 나가지 않았다. 어느 날은 기분전환 삼아 산책 코스를 바꾸었다. 돌아오는 길에 카페가 있었는데 이디야 인테리어가 바뀌어 있었다.


  기존에는 창가 자리에 대화하는 손님을 위해 동그랗고 낮은 테이블과 뒤로 많이 젖혀져 있어서 거의 눕듯이 되는 푹신한 의자 네 개를 두었었다. 그런데 이제는 원형 테이블 대신 스타벅스 같이 기다란 콘세트 달린 일자 테이블을 설치했다. 의자도 등받이도 있는 푹신한 의자로 바뀌었다. 게다가 은은한 스탠드 조명도 달았다.


  평소 창가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지만, 4명짜리 테이블이라 눈치 보여 앉아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인석으로 바뀌었다니, 앉아 보고픈 맘이 동했다. 아침에 신문에서 본 ‘거리두기 2.5단계 유지’라는 말이 내 의지를 막아섰다. 하지만 ‘아메리카노 2,800원 힘듭니다’라던 수도권 어느 이디야 점주님의 말이 바리케이드를 치워버렸다. 내게는 창가 자리에 앉아보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사장님에게는 소중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위대한 일보라는 합리화도 해보며 그날 바로 이디야로 나섰다.      


  조용해 보이는 카페의 자동문 버튼을 누르면 딸랑딸랑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누군가의 이야기꽃이 나를 반기는 날도 있지만 드물다. 카페에서 틀어 놓은 한국 가요와 알바생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딸그락딸그락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은은한 커피 향에 취해보고도 싶지만, 슬프게도 코가 막혔다. 사실 안 그래도 난 냄새에 둔감하다.


  창가에 가면 푹신하지만 테이블을 사용하기에 적당히 기울어진 의자가 날 감싸 안는다. 은은한 스탠드는 어엿한 조명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내 맘을 몽글몽글하게 한다. 널찍한 나무 테이블에 필통, 펜 트레이, 공책, 모래시계, 독서대 따위의 짐을 내려놓는다. 그래도 자리는 충분하다. 좁은 책상 위에서 공간 확보를 위해 끙끙대며 물건 배치를 고민하던 집에서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세팅을 끝내고 음료를 받아오면 마지막으로 밖이 훤히 보이는 통유리를 마주한다. 실내가 아니라 길거리 벤치에 앉아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 든다. 기분이 좋다.     

풀세팅 완료. 편안해진다.

  한동안 앉아 있다 보면 몸의 생채 시계가 알림을 보낸다. 눈이 뻑뻑하고 아파온다. 뭔가를 끄적이는 날은 손목도 저리다. 왼쪽 엉덩이와 다리에서도 찌리리 방사통이 올라온다. 하던 일에 집중이 안 돼 같은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는다. 이쯤 되면 더 버티고 앉아 있을 수 없다. 내 몸이 파업 직전에 보낸 최후통첩을 무시해선 안 된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카페에서는 쉴 수 없다.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기에 보는 눈이 신경 쓰인다. 그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갖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내가 의식하게 된다. 잠시 밖에 나가 거리를 걷기에도 알바생의 눈치를 보게 된다. 3,200원짜리 아메리카노 하나 시켜놓고 서너 시간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이 30분마다 일어나서 밖에 나갔다 온다니. 나를 진상 카공족으로 볼까 두렵다. 화장실을 가는 척 하기에는 요실금 환자로 보이기도 싫다.


  여러 합리적인 이유와 타당한 핑계 덕에 나는 앉아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가끔은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개 앉아서 쉰다. 그럼 휴대폰에 계속 눈길이 간다. 잠시 인터넷 인기글이나 문자 정도만 확인하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휘둘린다.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치열한 설전을 벌인다. 슬프게도 이런 싸움에서 나는 천사가 이기는 일을 보지 못했다. 처음 생각했던 시간보다 훨씬 지난 뒤에야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정말로 내 눈과 뇌가 쉬었는지 잘 모르겠다.     


  일어나지 못한다고 제대로 쉴 수 없는 건 아니다. 충분히 잘 쉴 수 있다. 내가 그러지 못할 뿐. 카페는 창밖이나 카페 내부로 시선을 돌릴 수 있다. 방에서 열심히 인터넷을 하다가 피곤함에 거실에 나가면 항상 똑같은 위치에서 가구들이 날 반긴다. 이제는 반기기는 하나 의심이 든다. 똑같은 차 지나가는 소리가 우리 집을 채운다. 가끔가다 무궁화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리기는 한다.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커다란 콘크리트와 똑같이 생긴 수많은 창문이 우두커니 서있다. 보기 싫다.


  하지만 카페 내부는 다르다. 열심히 제 할 일에 몰두하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 오늘이 마감 기한인지 쌓아둔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바쁜 사람, 서로 말 한마디 없이 각자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가끔 웃음을 터트리는 커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를 제지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엄마. 카페는 언뜻 보면 늘 같은 풍경 같지만 자세히 보면 늘 새로운 풍경이다. 휴대폰을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카페를 관찰하면 비로소 쉬는 느낌이 난다.     


  하지만 난 오늘도 카페 대신 창문을 쳐다보며 휴식을 취한다. 알록달록 빛이 나고 소리도 나는 만능 창문이다. 분명 쉬려고 보는 창문인데 보고 나면 눈이 아프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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