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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Nov 08. 2020

그들은 왜 싸워야 했을까

불쌍한 사람들, 10월 26일 병원에서

나는 여느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개 당일로부터 2~3주 정도는 예약이 꽉 차있기 때문에, 1주일마다 진료를 보는 나는 꼼짝없이 와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스르륵 자동문이 열렸다. 벨을 따로 달아놓지 않았기에 다른 장소였다면 사람 오는지 가는지도 몰랐을 테지만, 소리 없는 이곳에서 작은 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생각하기를 정신건강의학과 대기실만큼 조용한 곳은 시험기간의 대학 도서관 정도밖에 없다. 아니, 도서관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나 글씨를 쓰는 소리가 있으니 여기가 더 조용할지도 모른다.


"김! 노! 인!"

누군가 자동문을 열고 들어오며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외쳤다. 지팡이를 짚은 그의 걸음은 너무나 느렸지만 성격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빨라 보였다. 입구와 데스크가 거리가 꽤 멀어서 그런지 간호사는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김! 노! 인!"

할아버지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면서 다시 한번 크게 이름을 외쳤다.

간호사가 물었다.

"네, 어르신. 김노인... 34년생 맞으시죠?"

할아버지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다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김! 노! 인!"

"네네, 김노인 어르신. 생년월일이 34년생 맞으세요?"

"김! 노! 인!"

그렇게 두세 번을 더 한 후에야 할아버지는 간호사의 말을 알아들었다.

"34년! 모월! 모일!"

"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보시려면 시간 꽤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김노인의 귀에는 간호사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34년! 34년 모월 모일! 34년!"

"네, 알겠습니다. 앉아 계세요."

"34년 모월 모일! 34년!"

"34년!"

1분 정도의 시차를 둔 둘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상황이 시끄럽고 많이 답답했는지, 내 앞에 앉은 여자가 할아버지를 쏘아봤다. 옷을 쫙 빼입고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매우 도도하고 까칠해 보였다. 선글라스와 마스크에 가려서 눈빛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겉에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별로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시선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시끄럽게 이야기하는 노인이었을까? 아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간호사였을까? 누군지는 몰라도 그 시선을 받는 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좋지 않은 시선이라는 가정 하에, 이 여자도 가여웠다.


대화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서로의 외침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시라"는 말을 기어코 알아들은 후에야 끝났다. 그는 등을 돌려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밖에 없으니 아마 화장실에 가려고 했으리라.

노인이 등을 돌리자마자 한 여사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느리지만 성급한 걸음으로 데스크를 향해 갔다. 처음 들어오던 할아버지의 걸음걸이와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힘이 빠져 비틀비틀 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여사의 걸음은 당차고 씩씩했다. 여사는 할아버지보다는 빠른 걸음으로 데스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선! 생! 님!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이 떨렸다. 몸도 마찬가지로 부들부들 떨렸는데, 이는 서러움보다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나오는 반응인 듯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34년생이 잘못이에요? '아, 34년생, 김노인님, 맞으시죠? 원장님, 뵙게, 해 드릴게요, 기다리세요.' 하고 좋게! 말씀을! 드리면! 되지! 왜! 그렇게! 쏘아붙이듯이! 말씀을! 하세요!"

여사는 한 구절 한 구절 끊어가며 느릿느릿하지만 분명하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진료실에서도 다 들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래서 원장님 보실 거냐고 물어본 거잖아요!"

간호사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사는 멈추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간호사의 태도를 책망했다. 간호사는 이내 포기했는지

"네 네, 알겠습니다. 앉아 계세요"

하며 여사의 말을 끊었다.

"지금, 잔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냥, 입 다물고, 앉아, 있으라는 거죠?"

간호사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싸가지 없는 년."

여사는 중얼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날 여사님의 진료 시간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굉장히 길었다.


나는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누가 잘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저마다 그럴듯한 잘못을 한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과도하게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여사님은 분노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다. 간호사도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도 잘못한 게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이 때문에 귀가 잘 안 들려서 어쩔 수 없었다. 여사님도 병원에 다닐 정도로 마음이 힘드신데, 자기가 같은 꼴을 당하고 있다고 느꼈음에 틀림없다. 화를 주체하기 힘들다. 간호사도 사람이고 사실 할아버지를 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누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하니 화가 안 나고 배길 소냐.


그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그리고 나서서 중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불쌍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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