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발작을 처음 경험했다.
지난 20일에는 서울에 올라갔어. 행정고시 2차 시험을 치러 갔지. 야, 뭔 시험을 5일이나 친다더라. 21일부터 25일까지. 정말 5일 동안이나 치는 시험이 말이나 되냐? 시험장은 한양대였어. 짐 싸들고 한양 올라가니까 과거시험 치러 가는 느낌이 나더라. 그래도 과거시험 치는 선비 체통에 양민들처럼 급하다고 뛰어다니고 덥다고 부채질을 할 수가 있냐. 따가운 햇살에 온 몸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부채질 한번 하지 않고 햇살을 만끽하며 숙소로 갔어. 한양대 앞에 있는데 에어비앤비로 잡았어. 위치가 참 좋더라. 시험장까지 걸어서 5분이었으니까 말 다했지. 숙소도 사진 그대로였어. 사장님도 참 친절했어. 대신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 반지하 방이더라. 그런 얘기는 안 해줬었는데.. 내 생애 처음 들어가 본 반지하 방이었어. 어우 축축하고 습하고 눅눅하고, 이상한 냄새가 확 나더라. 뭔가 불쾌한 냄새. 게다가 창문을 열어놔도 환기도 안 되고 공기 중에 먼지가 계속 떠다니는 걸 보니까 '아, 이래서 반지하는 살지 말라고 하는구나' 깨닫게 되더라.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첫날은 나름 괜찮게 지냈어. 3시에 서울역에 도착해서 서울역을 헤매다가 4시에야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어. 시험은 12시에 끝나니까 난 오후에 서울 구경을 다니려고 했거든! 그래서 여행 가이드북을 하나 사러 교보문고에 갔단다. 그런데 참 난 서점이랑 안 맞는 것 같아. 서점에 서서 내가 '한 번에 다 읽지 않을' 책을 '일부만 읽어보고' 산다는 행위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네. 그래서 그냥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여행 계획도 못 짜고 가이드북도 못 고른 채로 광화문에 나왔어. 집회 금지한다고 경찰들 광화문에 좍 풀어놨던데 좀 불쌍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더라. 마치 인간 허수아비를 보는 것 같았어.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것보다 의경들 세워놓는 게 더 싸게 먹히나? 의경들을 굳이 이렇게 많이 세워놔야 하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더라.
그래도 덕분에 텅 빈 광화문 광장을 볼 수 있었어. 전에 두 번 올라왔을 때는 모두 시위하는 군중들로 가득 찼었거든. 광화문 광장 정말 넓더라. 왜 광장廣場이라는 한자를 쓰는지 한 번에 확 왔어! 광장 거의 중앙에서 하늘을 딱 올려다보는데 구름이 참 예뻤어. 저 멀리서 은은하게 노을이 지는데 구름이 뭉게뭉게 뭉쳐서 흘러가는 모습이 마치 구름바다를 보는 듯했어. 매트리스 솜만 빼놓은 것 같기도 하더라. 정말 빠져들고 싶은 하늘이야. 이렇게 예쁜데 봐주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하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어. 정말 달콤 쌉싸름한 하늘이었다.
다음날도 별 일은 없었어. 열심히 시험은 치고 나왔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더라. 남들은 10페이지짜리 답안지를 꽉꽉 채워 쓰는데 난 4월부터는 우울증을 핑계 삼아 제대로 공부도 안 했으니 답을 쓸 수가 있나. 아는 대로 3번 문제만 꾸역꾸역 내 마음대로 쓰고 나왔어. 점심은 한양대 앞 맛집이라는 우동을 먹고 친구를 만나러 나섰어. 사실 이 친구는 1차 시험에 떨어졌었거든. 그래서 내가 괜히 놀리러 가는 건 아닌가, 친구가 나를 고깝게 보진 않을까 굉장히 두려웠어. 사실 만나서 이야기하면서도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래도 만나니까 편하더라. 고등학생 때 그렇게 친한 친구였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참 편했어. 요 근래에 그렇게 즐겁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나 싶더라. 사소한 거 하나하나가 정말 재미있었어. 하지만 숙소는 최악이었고, 중간에 또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사건이 일어나서 머리가 복잡했어. 너무 우울하고 나 자신이 미워서 미칠 것 같았지. 커터칼을 안 가져와서 다행이지 있었으면 또 손목을 그었을 거야.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 따로 물어보렴. 이야기해줄게. 사실 별 일은 아니었어.
셋째 날이 고비였어. 어젯밤의 그 자기혐오와 우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었거든. 시험도 별로 눈에 안 들어오더라. 사실 아는 것도 거의 없었고, 그래서 이번에도 문제 세 개 중에 하나만 겨우 썼어.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은 없으니 심심해 죽겠더라. 그래서 문제지 뒷면에 오늘 뭐 할지 계획이나 써보기로 했지. 그런데 쓰다 보니까. 정말 관련 없는 이야기인데.. 갑자기 내게 편지를 쓰고 싶어 지더라.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뭘 원하는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정말 신이라도 들린 것 마냥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어. 그러면서 울었다. 소리 내면서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쓰다 보니까 눈물이 나더라고. 그 눈물은 자기 연민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 난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이제는 그래도 내 상태를 보다 정확히 안다는 사실에 기뻐서 흘린 눈물이었을까.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펜을 열심히 움직이다가 갑자기 멈추고 한 오분쯤 가만히 있고, 그러다 눈물을 흘리고. 다시 눈물을 닦으며 펜을 움직이는 나를 보고 감독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시험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비가 뚝뚝 떨어지더라. 한양대 앞에서 점심을 사 먹고 또 방에 들어갔어. 그 축축하고 눅눅한 곳에 계속 있다가는 돌아버릴 것 같아서 다시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지. 비가 와서 멀리 가지는 못하겠는데 또 실내 시설은 코로나 때문에 다 휴관이라서 갈 곳이 없더라. 사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종로 일대 조선시대 유적들, 그리고 마포대교였거든. 앞은 휴관이고 뒤는 비 때문에 가지를 못하겠었어. 카페라도 들어갈까 했지만 서울까지 와서 흔하디 흔한 카페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 생각에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아, 정말 미칠 것 같더라. 프랜차이즈는 안돼! 흔한 곳은 안돼! 반드시 서울만의 특색 있는 무언가를 보고, 먹고, 즐기고 가야 해!라는 압박감이 내 모든 걸 지배했어. 친구들도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아... 뭔가 견디기 힘들더라.
답답하고 우울한 기운이 내 몸을 휘감았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왕십리역 비트플렉스의 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는데 거기가 3층이었거든. 바깥에 테라스처럼 테이블이 있어서 밖에 나갈 수가 있었어. 거기 앉아서 왕십리 광장을 보며 든 생각이 '아, 여긴 별로 안 높아서 떨어져도 안 죽겠지.'였어. 뭐 평소에도 웬만한 모든 것들에서 죽음을 떠올리긴 해. TV에서, 산책로의 나무에서, 식물에게 물을 주며, 아침에 일어나며 항상 죽음을 떠올리지.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마포대교에 가고 싶은 이유도 단순히 자살명소라서였으니까. 그런데 그날 든 생각은 너무나 음침하고 무서운 것이었어. 정말 이대로 있으면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해서 죽어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들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황이 오더라고. 사실 난 공황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심장이 굉장히 빠르게 뛰고 숨이 빠르게 내쉬어지지. 친구에게 전화해서 30분쯤 이야기를 했는데 막 가라앉지는 않더라. 그래서 울먹이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지. 나 서울 싫다고, 시험 포기하고 부산 내려가고 싶다고. 엄마는 이유도 묻지 않고 내려오라고 하더라. 참 고마웠어.
도망치듯 떠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직접 체험해봤어. 짐 챙기고 지하철 타고 서울역 도착해서 ktx에 타기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렸어. 평소에는 그 자리 떠나서 조금 걷다 보면 다시 숨이 골라지던데, 도저히 그러지가 않더라. ktx 타고 광명역에 도착하기 전까진 계속 사실상 패닉 상태였어. 정말 죽는 줄 알았단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압박감과 어딜 가든 처음 보는 건물들, 그리고 계속해서 신경 써야 하는 대중교통이 내게 큰 스트레스였나 봐. 부산에서는 그런 생각도 안 들고 길 잃을 일도 없을뿐더러 역을 착각해 잘못 내리거나 버스를 잘못 타도 그냥 되돌아가면 그만이거든. 서울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는데 그때의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진 않았나 봐. 나 자신이 많이 힘들고 예민했는가 싶다. 마포대교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뛰어내릴까 봐 무서워서 못 갔어. 어차피 요새는 마포대교 cctv 24시간 돌아가고 빠지면 바로 경찰 떠서 구조한다고 하긴 하던데, 한번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내가 정말 죽고 싶을 때 그 기억이 떠올라서 못 죽을까 봐. 동시에 정말로 내가 떨어져 죽어버릴까 봐 두려웠어. 참 인간이 양면적이고 신기해. 그지?
부산역 도착해서 부산 지하철 타니까 딱 기분이 나아지더라. 정말 집에 온 기분이었어. 1호선 문이 열리고 그 익숙한 지하철 차량에 탑승하니까 또 눈물이 막 나더라. 주변 사람들은 무슨 미친놈인가 했겠지. 그래도 좋았어. '아,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지금까지가 내 서울 여행 이야기야. 읽어줘서 고맙다. 아래는 내가 시험 치면서 내게 썼던 편지야. 사실 내게 쓰는 편지이기도 하지만 사실 네가 봐줬으면 하는 편지이기도 해. 까만 건 내가 하고 싶은 말, 빨간 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야. 읽어줘서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실 네가 영원히 내 곁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다시 한번 정말 고맙다. 내게 친구라 부를 사람이 돼 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