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여우, 그리고 밀밭
"(선략)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을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어.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밀은, 금빛이어서,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고……."
여우는 입을 다물고 오랫동안 어린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발…… 나를 길들여 줘!" 여우가 말했다.
"그러고는 싶은데, "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 나는 친구들을 찾아야 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어느 것도 알 시간이 없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모두 상점에서 사지. 그러나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바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곁눈질로 너를 볼 텐데, 너는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아도 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옮김), <어린 왕자>, 열린책들, 2015, 86-87쪽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그리고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아!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난 너를 조금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해서……."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론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론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럼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얻은 게 있지. 저 밀 색깔이 있으니까." 여우가 말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옮김), <어린 왕자>, 열린책들, 2015, 87-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