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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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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Oct 01. 2020

관계는 늘 어렵다.

<어린 왕자>와 여우, 그리고 밀밭

가끔은 밀밭이 보고 싶다. 황금빛으로 물든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전통주 한잔 삼키고 싶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보고 있으면 저 황금이 다 내 것인 양 신이 난다. 잔뜩 돋궈진 기분에 술 한잔을 곁들이면 낙원이 따로 없다.


사실 밀밭은커녕 추수철 논도 본 적 없다. 전통주도 안동 소주 한번 마셔본 일밖에 없다. 그마저도 맛은 기억 안 난다. 그냥 상상이다. 생각해보니 전통주보다는 밀맥주가 좋겠다.



지난 목요일에 친구에게 엽서 한 장을 선물 받았다. 누가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맘에 든다. 녹색 풀밭과 청색 풀밭 사이에 여우와 어린 왕자가 사이좋게 앉아 있다. 둘은 저 멀리 펼쳐진 들판을 바라본다. 하늘은 어린 왕자의 머리칼을 닮은 노란색이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어린 왕자의 머리칼에 하늘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 것만 같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상담사에게 자랑했다. 엽서가 예뻐서 좋았다. 하지만 친구가 내 지나가는 말이나 행동을 잊지 않고 어린 왕자 엽서를 선물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내가 가진 어린 왕자(열린책들)와 친구에게 받은 엽서



엽서 속 여우와 어린 왕자는 나란히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미주알고주알 자기네가 살아온 독특한 경험을 이야기했을까? 아니, 아마 입도 뻥끗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둘은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서 말 한마디 없이 들판에 앉아 있었으리라. 아마 처음에는 멀찍이 떨어져 앉았겠다. 이 엽서를 그려낸 자리에서 그대로 첫날의 여우와 어린 왕자를 그려낸다면 풀밭과 들판, 하늘이 주인공일 것이다. 어쩌면 어린 왕자가 안 보이니 하늘도 파란색 일지 모른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차츰 경계를 풀어 갔을 테다. '저게 뭐 하는 짓이냐'할 정도로 미련하게, 하지만 우공(愚公)이 혀를 내두르고 갈 정도로 우직하게 둘은 느리지만 분명히 가까워지고 있었겠지. 해는 둘의 상황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한 마디도 안 하고 있던 놈들이, 달과 교대해서 잠시 쉬고 왔더니 아까 전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꼴이라니! 그런데 또 말은 안 한다. 보고 있는 해는 얼마나 복장이 터질까?

둘은 그렇게 가까워졌을 것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내일은 오늘보다 한 걸음 더. 어떤 날은 두 걸음을 내디뎠을 수도, 또 하루는 가만히 있었을지도 모른다. 둘은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진다. 여우는 어린 왕자의 냄새를 맡고 싶은 본능을 참아내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다. 어린 왕자도 여우의 탐스러운 꼬리를 만지고픈 욕망을 억누르면서, 둘은 긴 시간 동안 서로를 길들였을 것이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말이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한 둘의 이야기는 이렇지 않았을까.

"우리 이것도 인연인데 사진이나 한 장 찍을래?"

그 순간이 돌고 돌아 내게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기분 좋은 상상이다.


"(선략)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을 보아도 떠오르는 게 없어. 그래서 슬퍼! 그러나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래서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거야. 밀은, 금빛이어서, 너를 생각나게 할 거야. 그래서 나는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고……."
여우는 입을 다물고 오랫동안 어린 왕자를 바라보았다.
"제발…… 나를 길들여 줘!" 여우가 말했다.
"그러고는 싶은데, " 어린 왕자가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 나는 친구들을 찾아야 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 수 없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어느 것도 알 시간이 없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모두 상점에서 사지. 그러나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바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난 곁눈질로 너를 볼 텐데, 너는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아도 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옮김), <어린 왕자>, 열린책들, 2015, 86-87쪽



둘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도 몽글몽글해진다.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하지만 흐뭇한 것도 잠시다. 어느새 반추에 빠진다. 나는 어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내 머리는 생각 대신 감정에 매몰된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눈썹이 찌푸려진다. 입에서는 탄성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는 처음부터 여우와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혹여나 여우가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나를 부담스럽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여우가 날 좋아할 이유가 없는데……' 하는 생각에 주저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다.


여우는 머뭇거리며 서성대던 나를 발견하고 먼저 내게 다가왔다. 나는 겁이 났다. 누구든 결국 내 모습을 알게 되면 날 싫어하고 버릴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여우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컸기 때문에 달아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여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거리를 좁혀왔다. 여우 덕에 우리 사이 거리는 많이 좁아졌다. 겉보기에도, 스스로 느끼기에도 많이 친해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지우지 못했다. 내가 다가가면 여우는 날 싫어하고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선을 긋고 갑옷을 입었다. 계속 여우 옆에 있고 싶었기에 조금씩 다가가기는 했지만,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선에 막혔다. 절대 선을 넘지 않았고 갑옷도 벗지 않았다. 그 이상 내 본모습을 보이면 여우가 등을 돌릴 거라고 믿었다.


실제 거리는 좁아졌지만 내 마음의 거리는 더 이상 좁혀지지 않던 어느 날, 내 갑옷이 깨졌다. 내가 벗고 싶어 벗은 게 아니었다. 여우가 벗겨버리지도 않았다. 전혀 상관없는 제3의 상황에서 그럴만한 일이 있었다. 갑옷 없는 맨몸을 보인 나는 여우가 이제 내게 등 돌릴 거라 생각했다. 내일 들판에 나가면 여우는 온데간데없이 풀과 하늘만이 날 비웃을 거라는 악몽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여우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들판에 모습을 보였다.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다가오는 속도는 더 느려졌고 때로는 가만히 있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날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안심했나 보다. 두려움은 빠르게 안도감에 섞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여우는 나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 급하게 다가갔다. 너무 성급하고 빠르게. 여우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오해의 근원이라던 말도 많아졌다. 가끔 두려움이 꿈틀거릴 때마다 더 많은 말을 했다. 파국의 시작이었다.


여우는 갑작스레 다가오는 내게 부담을 느꼈는지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회색 빛이던 내 두려움은 다시 뚜렷하게 자기 색을 되찾았다. 물과 기름이 분리되듯 안도감 위에 두려움이라는 기름이 층을 만들었다. 기름은 내 모든 걸 휘감았다. 멀어지는 여우에게 더 다급하게 매달렸다. 어리석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때의 난 어쩔 수 없었다. 슬프지만 지금의 나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여우가 떠나고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하지만 두려움은 더 커졌다. 이제는 내가 불안이라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겁난다. 어떤 관계든 모두 피상적으로만 느껴진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다를 건 없다. 내게는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들어 줄 일도, 사람도 없다. 공허함과 무의미함은 내게 산소와 같았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죽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하지만 막상 죽으려 했더니 무서웠다. 살기 위해 상담센터를 찾았다. 지금은 상담사의 권유로 정신과도 다니고 있다.

 

서로 차츰 가까워지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모습,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내 상태를 이제는 나름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도 있게 됐다. '사회적 침투 이론'이나 '성격장애', '유기 불안', '인지왜곡' 따위 단어로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 말로 글을 쓸 만큼 잘 알지도 못하며, 바뀌지도 못했다. 여전히 나는 공허의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 그리고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여우가 말했다.
"아! ……울음이 나올 것 같아."
"그건 네 잘못이야. 난 너를 조금도 괴롭히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길들여 달라고 해서……."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론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런데 넌 울려고 하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물론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럼 넌 얻은 게 아무것도 없잖아!"
"얻은 게 있지. 저 밀 색깔이 있으니까." 여우가 말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황현산 옮김), <어린 왕자>, 열린책들, 2015, 87-88쪽


내 인간관계는 두려움이 지배한다. 버려질까 두려워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나마 이어진 관계도 불안을 견디지 못한 내 행동으로 인해 파탄 난다. 내가 문제라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깨진 관계 하나하나가 다 아쉽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하는 미련이 남는다. 후회 속에 갇혀 있는 내게 여우의 말은 따뜻한 위로가 돼줬다. 물론 모두에게 이 말이 위로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상대가 정말 개차반에 쓰레기였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저 밀 색깔이 저주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어떤 시인이 얘기했듯이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니 말이다.


좋은 기억이든지 슬픈 기억이든지, 누군가를 길들인 흔적은 분명히 내게 남는다. 넓게 펼쳐진 황금빛 대지가 나를 배부르게 해 줄 밀밭 일지, 아니면 물 한 모금 없는 사막 일지 길들여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이 사람이 밀밭이기를 바라며, 나도 밀밭이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가끔 내 안에 생긴 밀밭을 둘러보며 감상에 젖는 하루가 있다. 내가 스쳐 지나간 이들에게도 내가 하나의 밀밭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내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사막인지 밀밭인지도 모를 내 흔적따위를 관리해주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 아주 가끔은 찾아오고 싶은, 둘러보고 미소 정도는 지을 수 있는 땅이기를 희망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잘 쓴 글은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늘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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