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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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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메다 Feb 23. 2021

여우와 신 포도, 정신승리

2월 22일, 병원에 다녀와서

요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회피'다. 시험이 11일 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하루종일 도망만 치고 있다. 시험이 다가와서 그런가. 전혀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단순히 공부가 하기 싫은 거라면 모르겠는데 숨 쉬는 것 말고는 다 귀찮다. 하기 싫다. 사실 숨도 할 수만 있다면 그만 쉬고 싶다. 아무튼 그런 상태다.


공부를 하려고 하자니 집중은 안 되고, 몸은 이리저리 떨린다. 다리를 떨고, 이를 의식적으로 멈추면 팔을 흔들고 몸을 비튼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결국 못 버티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 곳곳을 배회한다. 그렇다고 게임을 하자니 게임을 할 에너지도 없고, 책을 읽자니 글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요즘 새롭게 찾은 취미인 피아노를 치자니 팔이 아프고 마냥 누워만 있자니 자괴감이 든다. 지난 금요일부터 이런 상태였다.


병원에 가서 이야기를 했다. 만사가 귀찮다는 내 표현에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이메다님은 스스로가 불안하다는 걸 인정하기를 굉장히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귀찮다기보다는 불안한 거 아닐까요?"

"불안이요? 불안... 불안하다고 느낀 적은 없는데."

"안절부절 못하고, 집중이 안 되고, 무기력하고 한 건 대개 불안할 때 나오는 행동들이죠.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밑밥을 까는."

"밑밥이요?"

선생님은 말을 않았고,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짧은 침묵을 깨며 말했다.

"맞아요. 전 불안하다고 생각은 안 하는데, 왠지 모르게 당장 1차시험 공부 대신 2차시험 공부에 매달리는 것 같아요."

"소위 밑밥을 까는 거죠. 내가 전력을 다해서 여기에 도전했는데 실패하면 내 자존감이 많이 내려가잖아요? 그걸 막기 위해서, 난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어 하고 미리 합리화를 하는 거죠. 이메다님도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요?"

"......"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기 싫은 면이 있어요. 그리고 그 부정적인 나를 모두 인정하려면, 인간은 못 버텨요. 하지만 부정적인 모습을 인정해야 마음이 더 편해질 수 있어요. 부정적인 나를 인정하지 않고 밑밥을 잔뜩 깔아두면 나중에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실제 내 모습이 너무 멀어져서 감당이 안 되거든요."


맞는 말이다. 나는 내가 남에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하나 있다면 암기를 잘 한다는 건데,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암기력을 활용할 수 있어야 도움이 되지. 다행히 나는 암기를 잘 했고, 투입 대비 산출이 좋아서 적당한 대학교에 적당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웬만한 시험은 다 붙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고, 솔직히 말해 학벌이 능력에 비해 떨어진다고 스스로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임용이 아니라 고시를 준비했다. 좋은 직장을 가지면 나는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내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거니까. 그래야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를 버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난 1차시험은 꽤 큰 점수차이로 합격했으나, 2차시험에 들어가서는 말도 안되는 점수로 과락을 받아 떨어졌다. 본격적으로 2차 공부를 시작하니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시험인가?"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들었고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다. 안그래도 낮은 자존감인데 땅 깊은 줄도 모르고 땅굴을 파고 내려갔다. 그렇게 우울과 불안에 빠져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다시 1차 시험 기간이 왔다. 나는 "저번 시험때는 1달 하고도 잘 했으니까, 이번에는 2주일이면 떡을 치겠지" 하며 2차 공부를 손에 잡았다. 하지만 1차에서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1차를 공부하지 않고 꾸역꾸역 2차 공부를 진행했다.


그 뒤에는 선생님이 말한대로 밑밥을 까는 심리가 있었다. 만약 떨어진다면 '아, 난 겨우 2주일밖에 공부 안했는 걸.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려고 했다. 만약 붙는다면 '야, 내가 이렇게나 대단한 사람이야!' 하고 주변에 자랑하고 싶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완벽한 논리로 무장한 나는 현실에서 벗어난 채 계속 나만의 세상에 빠져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1차든 2차든 하나를 잡고 공부하는 거였는데, 이도 저도 아니었다. 하나도 제대로 못했다.


1차 공부를 소홀히 한 데는 이런 생각도 있었다. '나는 2차 공부가 잘 안 돼있으니까 저번처럼 1차 붙어도 2차에선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이번 시험은 어차피 의미 없어.' 이것도 역시 밑밥이다. 혹여나 떨어진다면 하기 위한 변명이다. 중요한 시험이 아니니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준비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얼마나 좋은 변명인가?

하지만 선생님은 이런 내 생각에 초를 치며 한 마디를 보탰다.


"어차피 2차에서 못 붙는 실력이라고 해도, 1차를 붙고 2차를 떨어지는 거랑 1차를 떨어져서 2차를 못 치는 건 전혀 다르죠. 1차에 전력을 다했지만 아쉽게 떨어졌다면 '아, 어차피 2차 가서도 좋은 점수는 못 받았을 거야.' 하면서 자기를 챙길 수 있지만, 시작부터 실패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어차피 2차 가면 망할 거야~' 하며 1차를 소홀히 하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게 없죠."


뜬금 없이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떠올랐다. 요즘 인터넷상에서 '신포도질'이라는 단어는 소위 정신승리를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아냥대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유래는 이솝우화의 '여우와 포도' 이야기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한 여우가 포도밭에 가서 포도를 따 먹으려고 했는데, 포도가 너무 높은데 달려 있어서 점프를 해서 따 먹으려고 했는데, 끝끝내 닿지를 않아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여우는 "저 포도는 어차피 신 포도일거야!"라고 투덜거리며 걍 포기하고 가 버렸다는 내용이다.

소위 '신포도질'이 과연 놀리고 조롱할만한 행동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우는 어차피 포도를 못 따먹을거라는 생각에 미리 밑밥으로 '저 포도는 신 포도일 거야'라는 말을 깔아놓지 않았다. 여우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포도를 따먹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한 거다. '저 포도는 신 포도일 거야!' 최선을 다한 다음의 자기합리화나 정신승리인 셈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런 정신승리는 개인 차원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어쨌거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다음, 실패한 자신을 인정하며 또 자기 자신을 케어해주는 매우 성숙한 방어기제가 아닐까 싶다.


그에 반해 나의 신포도질은 많이 미숙하다. 정말로 단 포도도 신 포도로 만들 수밖에 없다. 내가 많이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상담을 시작한지 벌써 1년이지만 정말 쉽지 않다. 너무 어렵다. 솔직한 마음으론 이제는 그만 하고 싶다.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 이것마저도 신포도질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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