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탈을 쓴 불안이라는 놈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다.
공무원 시험을 접수했다. 이전에 지역인재 가산점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글을 남겼는데, 결국 가산점을 포기하고 교육행정직에 지원했다.
경제학 예비순환 강의를 완강했다. 예비순환은 쌩 기초 이론 강의를 의미한다. 78강이나 되는 가장 긴 강의이다. 다 들으면 뿌듯할 줄 알았는데 별로 뿌듯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의를 다 듣고 나니 의욕이 확 떨어지고 안절부절못하는 정신상태가 계속됐다. 6시에 강의를 다 듣고 정리까지 다 했는데, 10시가 넘도록 책상에 앉아서 밥도 못 먹고 무기력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그냥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고,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뿌듯한 성취감이 들어야 할 일이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ADHD 치료약인 페니드를 먹었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이 약을 ‘의욕을 올려주는 약’이라고 설명해줬다. 각성제라서 밤에 먹으면 수면을 방해하는 메커니즘을 가졌기에 원래는 아침, 점심에만 먹는 약이다. 하지만 당장의 이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면 이 약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페니드를 먹고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말똥말똥해지는 게 느껴졌다. 명상 어플을 켜서 명상을 좀 하고 바로 일기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상담사에 빙의해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OO 씨, 오늘은 왜 성취감을 느낄 일인데도 성취감 대신 안절부절못한 마음이 드나요?”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한 셈이다.
사실 생각하는 건 많이 귀찮은 일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더욱더 귀찮은 일이다. 한 날은 의사에게 가서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싫고 답답하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의사가 물었다.
“왜 공간이 싫고 답답할까요?”
나는 답했다.
“세상에 싫은 데 이유가 있나요? 그냥 싫은 것 같은데...”
“그냥 싫은 건 없죠. 그 이유를 생각하기 귀찮은 것뿐이죠. 고통스럽거나.”
맞다. 이유를 생각하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왜 불안한지, 왜 초조해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내 무의식이 계속해서 “그냥 싫다고 해!”라고 하는 것을 살살 달래면서 이유를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끊임없는 질문이 필요한데, 상담사나 의사가 질문을 던져주는 거라면 몰라도 혼자서 질문과 답을 이어가는 건 절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도 일상생활 속에서는 갑작스러운 불안이 닥쳐올 때 그것이 불안인 지조 차도 모른 채 오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못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
어쨌거나 약을 먹고 나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고 나니 강의를 다 들어서 앞으로의 계획이 막막한 것이 내 무기력의 이유였다. 나는 강박성 성격장애를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완벽주의다. 모든 상황을 내가 통제하고 싶어 하고, 최대한 완벽해짐으로써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성향을 지녔다. 그런데 커리큘럼이 짜여 있는 강의가 다 끝나버렸으니 앞으로의 공부 계획은 내가 스스로 짜야하는 것이다. 하루에 얼마나 진도를 나갈지도 모르고, 그걸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불안했던 것이다. 내가 앞으로 따라갈 완벽한 틀이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나는 네 시간이나 책상에 엎드려서 무기력하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안했구나, 그래서 내가 무기력하게 쓰러져 있었구나. 열심히 나를 달래며 내일의 계획을 짜는 오늘이다. 네 시간을 허비한 것보다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날 따뜻하게 위로해줬다는 사실을 기억에 더 남기고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