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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해도 나는 좋아

문과남자와 이과여자

by 이사라

남편은 천상 선비다. 원래 그의 꿈은 위대한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공부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는 사람이다. 물론 지금은 위대한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이미 접었고, 나와 함께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지만, 그 은퇴 생활이라는 것도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거나, 날마다 망각 속에 사라지는 어학공부를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실용적인 능력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선비는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져도 지붕을 고칠 생각을 안 한다. 선비의 생각은 이렇다. 천장이 샌다고 절대로 지붕에 올라가면 안 된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발을 내딛는 순간, 발밑에 금이 갈 것이며, 그러면 한 방울씩 새던 빗방울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테니까. 뭔가를 고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겁나는 짓이다. 지붕이 새면 그 아래 양동이를 갖다 놓으면 간단한 일을.... 하고 생각한다.


내가 운영하던 약국 싱크대의 하수구가 막혔을 때도 남편의 태도는 그러했다. 어느 날 싱크대에 물을 버리니 약국 바닥에 흥건이 물이 새어 나왔다. 배수관 어딘가가 막혀 물이 역류하여 바닥에 넘쳤다.

나는 배수구 세정제를 사다가 몇 통을 부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하수구를 뚫는다는 전문업체를 찾아 전화를 하였다. 처음에 온 사람은 아주 젊은 남자였다. 사장은 아니고, 사장밑에서 일을 배우는 실장 같았다. 그래도 전문가답게 뭔가 무거운 기계를 약국 안으로 들여오더니 배수구에 넣고 시끄럽게 기계를 돌렸다. 뭔가 뚫리는 것 같았다. 배수구가 아니라 배수관에 구멍이라도 낼 것 같은 기세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계가 돌아갔다. 그 요동치는 시끄러운 소리에 뭔가가 뚫리겠지 하고 기대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람과는 달리 삼십 분간 약국 안에 소음을 가득 차게 하더니 "죄송합니다. 이따가 다시 올게요" 하고는 잠적해 버렸다.


전문가라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네. 그중 능력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하고 나는 낙담한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서 다시 검색을 했고, 이번에는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고, 내시경을 이용해 어떤 배수관도 뚫는다는 다른 업체에 전화를 했다.

이번에 온 사람은 그보다 더 경험이 있어 보였다. 그가 타고 온 커다란 트럭에는 갖가지 도구가 실려 있었다. 역시 베테랑은 달라. 아까 온 그 애송이하고는 장비부터가 차이가 나는군. 하고 나는 잔뜩 기대를 하였다.

그는 약국의 싱크대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기다란 내시경을 꺼내 배수구 안에 집어넣고 배수관 상태를 점검하였다. 역시 전문가다운 포스가 느껴지는군. 하고 안심하려던 순간, 그는 배수관이 붙박이장 뒤에서 구부러지기 때문에 붙박이장을 뜯어내지 않고는 고치기가 힘들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쨌든 뚫어 볼게요. 그리고 배수관을 청소하려면 비용이 수십만 원은 듭니다 " 하고 말했다.

그가 여러 개의 장비를 번갈아 사용하며 뚫어보려고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결국 그도 뚫지 못했고, 나는 돈만 뜯기고야 말았다.

"안되네요. 이 장을 뜯어 버리기 전에는 힘들겠어요. 어쨌든 출장비 5만 원은 주셔야 합니다."

하고 그가 말했고, 나는 너무 낙담하여 대꾸할 말도 잊은 채 얼떨결에 돈을 내주었다.

아니, 뚫지도 못했는데 돈을 받아요? 하는 억울한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그는 돈을 받자 쌩하고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하나? 저 붙박이 장을 뜯어내? 하지만 너무 큰 공사가 될 것 같은데. 이때쯤이면, 막힌 배수관 문제로 나나 남편이나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었다. 거의 일주일째 싱크대 사용을 못하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돈마저 뜯겼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인테리어업체를 불러 붙박이장을 뜯어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별도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내 계획들 듣자마자 남편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곳에 물만 안 버리면 된다고 간단한 판단을 내렸다.

"일을 크게 벌이지 말고.., 물만 여기에 안 버리면 되잖아. 버리는 것만 밖에 나가서 버리면 되지."

그때 남편의 머릿속은 붙박이장을 뜯어내느라 약국을 망가뜨린다는 공포가 덮쳐왔을 것이다.

어찌 그리 신박한 생각을... 제발 도와주지 못하거든 방해나 하지 말길..

나는 인테리어 업체에게 연락을 하여 붙박이장을 뜯어내는 대신 조그만 구멍을 내어 해결을 하였다.


남편은 뭔가를 고치려고 손을 대면 댈수록 더 망가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적극적으로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을뿐더러 겁을 낸다. 심지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의 뜻에 어깃장을 놓는다고 하소연을 한다. 핸드폰이고 컴퓨터고 작동이 안 되면 나를 불러서 말한다.

"이것 봐. 기계들은 나를 싫어한다니까. 나만 미워해. "

모든 사물들이 나름의 감정을 갖고 있어서 자기가 손대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반항을 한다고 내게 변명하곤 했다.

"어떻게 사물들이 감정이 있어? 당신이 못하니까 그렇지."

"아니야. 나는 하라는 대로 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얘가 삐져서 꼼짝을 안 해. 뭐가 서운했나? "

해마다 갱신해야 하는 은행인증서를 컴퓨터에 다시 깔아야 할 때도, 핸드폰에 앱을 설치할 때도 꼭 나를 불렀다.


남편이 못하는 것은 너무 많았다. 그 간단한 선풍기 조립도 못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 건 못하려야 못하기가 쉽지 않은데... )

형광등을 갈아 끼우는 것도, 어쩌다 남편이 으스대며 자랑했는데

(사이즈를 맞는 걸 사다 끼워야지 이렇게 규격에 안 맞는 걸 끼워 놓으면 어째.)

내가 형광등을 반품하고 다시 사다 끼워야 했다.

처음 산 예초기를 조립을 못해서 반나절을 낑낑대다가 남편이 풀 죽은 목소리로 약국에 전화했을 때는

"여보. 괜찮아. 내가 퇴근해서 조립해 줄게. 내일 당신이 벌초하러 가는 데는 문제없을 거야."

하고 위로를 해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약국의 인터넷이 먹통이 되었을 때 나는 페닉에 빠졌다.

인터넷이 안되면 처방전 입력도 안되고 약값 계산도 못할뿐더러 인터넷과 연동되는 카드단말기도 작동이 안 된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그런 상태가 올까 봐 두려웠는데, 어느 날 출근하니 무엇 때문인지 인터넷이 안되었다. 업체에 전화를 하니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이를 어째. 인터넷이 안되네. 그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나는 부들부들 떨며 진땀을 흘렸다.

집으로 가려는 남편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옆에 붙잡아 두었다.

"인터넷이 안돼. 당신 집에 가지 마. 옆에 있어"

나는 긴장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는데 남편은 옆에서 별일 아니라는 듯 여유롭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 하루 옆 약국으로 가라고 하지 뭐. 큰 일 날 거 하나도 없어. 마음 편히 먹어."

신기하게도, 남편이 손을 잡아주자 내 마음이 진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별 일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일.

그때 나는 알아보았다. 남편이 인터넷은 못 고쳐도 그로 인해 낙담한 내 마음을 고쳐 줄 수는 있다는 것을..

그는 항상 나에게 문송(문과라서 죄송하다)하다고 말했는데, 그는 존재 자체로 내게 큰 의지가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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