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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아내와 사는 건

그건 참 힘든 일일세

by 이사라

나는 건망증이 무척 심한 편이다. 그것은 아마도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아버지도 건망증이 심하셨고, 바로 아래의 동생 또한 건망증이 아주 심했다.

나는 학교에 준비물을 빠뜨리고 가기 일쑤였으며 어느 날 준비물을 가지러 집에 돌아오니 출근하셨을 아버지가 집에 계셨다. 부녀간에 주고받는 대화는 이랬다.

"출근 안 하셨어요? 나는 체육복을 빠뜨려서 가지러 왔는데.."

"나도 뭘 빠뜨려서 출근했다가 도로 왔다"

이쯤 되면 나의 건망증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확실한 듯하다.


건망증은 공부머리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 내 동생은 공부를 집안에서 제일 잘했고, 모두가 선망하는 S대에 들어갔지만 건망증은 우리 집안에서 제일 심한 편에 속했다. 아버지가 붙여준 별명도 콩새였다.

동생은 엄마가 부엌에서 뭔가를 가져오라고 시키면, 부엌에 들어가서는 뚜껑 닫힌 냄비를 보고 호기심이 급 발동해 냄비뚜껑을 일일이 열어보다가 (이 안에 뭐가 들었나?) 엄마가 가져오라고 시킨 국자나 컵, 등은 까맣게 잊고 빈손으로 그냥 돌아오곤 했다. 교실에서 굴러다니는 체육복이나 필통 등도 반장이 '이거 누구 거?'하고 물으면 급우들이 일제히 동생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가자 나의 건망증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내게 삶의 회의가 들게 했다. 시험을 앞두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리지를 않나. 그때 노트를 빌려주고 책도 빌려주던 친구가 없었다면 F학점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돈을 받던 날 지갑을 공중 화장실에 놓고 나오는 바람에 나는 한 달 내내 돈이 없어 집안에만 꼼짝 않고 지내기도 했다.

직장을 다닐 때는 출근길에 지갑을 두고 와서 전철역에서 사람들에게 표를 구걸한 적도 있고... 전철 개찰구 앞에서 표를 찾지 못해 온 가방과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으려면 사는 것에 대한 비애마저 느껴졌다. 사는 게 왜 이리 힘들지? 하는 생각


약국에 다닐 때도 곧잘 뭔가를 잊어버려 집에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여러 번. 코로나 시기 때는 마스크까지 써야 해서 출근길에 챙길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내가 출근하려면 소파에 앉아서 아침마다 노래를 불러 주었다.

"마아스크~ 해앤드폰~ 도오시락~ 여얼쇠~ "

그런 노래를 들으며 하나씩 확인하다 보면 확실하게 나갔다가 도로 돌아오는 경우가 줄었다.


그렇다고 출근시간이 빨라진 것은 아니다. 금방 손에 들고 있었던 핸드폰도 마스크를 챙기다 보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그 핸드폰을 찾으러 이방 저 방 돌아다니다가 남편에게 전화 좀 걸어봐, 하고 보면 내 가방 깊숙한 곳에서 벨이 울리기도 했다. 출근해서 웬 부재중 전화지? 하고 열어보면 집에서 내 폰을 찾느라고 남편이 걸었던 전화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약국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도시락 밥통 속에 밥이 없는 것이 아닌가.

도시락을 챙겼는데, 밥을 빠뜨렸군.. 그 후로 남편은 노래 끝에 밥!! 하고 붙여 주었다.

"마아스크~ 해앤드폰~ 도오시락~ 여얼쇠~ 밥!!"

그러더니 "힘들어. 건망증 아내와 사는 게 힘들어" 하고 하소연을 했다.

이제 출근할 일이 없으니 그런 일들도 다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건망증으로 인한 고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얼마 전에 친구부부와 트레킹을 갔을 때.

내가 또 핸드폰을 공중 화장실에 놓고 나오는 바람에 20여분을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와야 했다.

그때는 길을 인도하던 친구 남편과 덩달아 같이 뛰던 친구까지 고생을 시켰다. 그나마 핸드폰을 찾았으니 다행이지 잃어버렸다면 그날의 즐거운 일정이 다 망쳐졌을 뻔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집안 내력인 걸 어쩌겠는가.

조심, 또 조심하지만, 이젠 뭘 잃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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