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하지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싸늘한 태도를 보여서 실망했다고?"
남편이 얼마 전에 나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을 듣고 나는 당황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10년이나 지났으니까, 하지만 그때 남편의 기대대로 팔을 활짝 벌리며 다정하게 안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항상 순진하게 이상적인 아내상을 바라는 남편이 기대했던 장면은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것이다.
퇴직한 남편을 안아주며 아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보,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이제 당신은 푹 쉬어요. 남은 인생을 즐기고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인생은 한번뿐이잖아요."
그때 나도 그렇게 했으면 좋았으련만.
남편이 아마 60대쯤 퇴직을 했더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남편은 겨우 50살이었다.
아이들은 이제 중2학년을 막 올라가려던 때였고. 앞으로 대학 졸업 때까지 긴 세월이 남아있었다.
남편이 퇴직하던 날 가지고 온 커다란 박스를 바라보던 내 마음은 몹시 심란했다. 그제야 남편의 실직이 실감 난 것이다. 남편은 이제 더 이상 돈을 벌지 않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내게 말했지만 나는 설마 그렇게 할까. 아직 아이들이 어린데, 하고 생각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큰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공이 불투명한 학자로서의 길을 택하는 대신 입시 학원 강사로 살아왔다. 나는 남편의 적지 않은 수입으로 아이들에게 욕심껏 교육을 시켰다. 좋다는 책도 거리낌 없이 사주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를 위해 수영 개인 교습도 시키고, 영어는 개인 과외선생님에게 맡겼으며 큰 아이에게는 원비에 구애받지 않고 학원을 다니게 했다. 나는 그 생활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것이 남편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을 접고, 희생한 대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또한 그렇게들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한 가장의 희생은 어느 가정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도 많은데..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인생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학원에 들어가기 전,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는 내 질문에 남편은 "진리탐구를 하겠다"라고 했다.
"진리 탐구? 그건 너무 막연하잖아. 차라리 교수가 되기 위한 길을 가겠다고 해."
남편에게 교수가 된다는 것은 교수들의 비위를 맞추며 청탁을 해야 하는 굴욕적인 어떤 과정을 의미했다.
영화 <프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주인공이 케이크를 들고 지도교수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난 그런 짓은 절대 못해. 교수 사회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서로서로 연줄로 연결되는지.."
남편의 병적인 결벽증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진리탐구를 마음껏 하라고 밀어주지도 못했다. 나에게는 남편의 인생보다 청각 장애 아들에 대한 걱정이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남편이 입시 학원에서 몇 년을 버티는 동안, 그것이 얼마나 남편의 내부를 갉아먹었는지는 짐작도 못했다. 그 입시 학원은 강남에서 제일 유명했고, 남편은 매년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수 강사상도 몇 번이나 타 왔으므로 남편이 그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머리에 원형 탈모증이 생기고,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찐득찐득하게 떡이 지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해가 지남에 따라 남편의 표정은 어두워졌고, 어느 날부턴가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담임을 맡았음에도 학부형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녀를 입학시켜 달라는 온갖 청탁들이 동문회나, 친구, 친지들을 통해서 들어왔으나 남편은 모두 거절했다. 거절하면서 괴로워했다.
인간관계가 모두 끊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퇴사하겠다고 말했을 때 그 결정을 반대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라고. 당신의 결정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는 커다란 바위를 의식해야 했는데, 그 바위가 너무 무거워서 퇴직한 남편을 따듯하게 맞아줄 여유가 없었다. 남편은 그것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