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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귀한 아들 10화

성적의 전환점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by 이사라

"넌 이제 공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돼."

남편은 둘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둘째가 남은 한쪽 귀마저 인공와우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에 있었던 중 1 겨울 방학 때였다.

그 당시, 나는 집 근처 약국에서 근무약사로 일하고 있었고 남편이 아들의 간병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바빴던 남편이 둘째와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둘째는 성적이 점차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러있었고, 특히 영어는 개인교습을 받고 있었는데도 60점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중학생이 되니 게임에 빠져 피시방에 드나들었고,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우리는 둘째가 성적으로 대학에 들어가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둘째의 진로를 마련해주어야 할까, 가 우리 부부의 고민이었다. 앞으로 둘째는 어떻게 살아갈까. 집안에 틀여 박혀 온종일 컴퓨터게임에만 몰두하는 '히키코모리'가 될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지만, 내 머릿속에 밝고 희망찬 둘째의 미래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좋아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둘째는 공부를 잘하고 싶어 했다.

"왜요? 나도 인문계 가서 대학 가고 싶은데."

"진짜? 지금대로라면 대학에 못 가. 실업계에 가면 그렇게 공부 잘하지 않아도 돼."

둘째는 눈물을 떨구었단다. 쌍둥이 형은 매번 우등상을 받아왔고, 특목고에 보내려고 준비 중인데, 자기는 인문계 고등학교도 포기하라니,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실감되었나 보다.

둘째의 우는 모습이 남편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단다. 둘째는 예전 유치원에 다닐 때도 다 틀린 뺄셈 시험지를 펼쳐놓고 '난 못해. 난 못해' 하면서 아빠 앞에서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모습과 겹쳐져 남편은 마음이 아팠단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둘째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럼, 아빠가 하라는 대로 해볼래? 아빠가 공부를 도와줄게."

그렇게 해서 남편은 나에게서 바톤을 물려받고 둘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동안 둘째의 공부를 내가 봐주고 있었는데, 이제 직장을 그만둔 남편이 둘째의 공부를 전적으로 맡게 된 것이다.


겨울방학 동안 남편은 아들의 국 영 수를 맡아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부실했던 기초를 다시 단단하게 다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수학문제집을 같이 풀었고, 영어 단어장을 만들어 날마다 단어 테스트를 했고, 기초 문법책을 여러 번 반복시켰다. 하루에 거의 10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느라고 아들의 엉덩이에는 뾰루지가 잔뜩 돋아 있었다. 그렇게 공부시키는 남편도 집요했지만 그걸 또 따라서 하는 둘째도 끈질긴 근성을 보였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고, 아빠와 함께 시험공부를 한 후 처음 본 중간고사에서 아들은 자기가 받은 성적에 놀라워했다. 예전에는 영어시험이 그렇게 어려웠는데, 문제를 보니 거의가 다 알겠어서 놀랐다고 했다.

중 3학년이 올라갈 때까지 1년 남짓한 기간에 아들의 성적은 몰라보게 상승했다.

이제 더 이상 둘째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들은 그 기간에 성적이 급상승하는 인생의 체험을 하게 되었지만, 그 시간은 또한 무척 힘겹고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이기도 했으리라.


중 3이 되자 아들은 아빠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아들을 큰 소리로 나무라는 남편의 소리가 잦아졌다. 급기야는 아들이 "더 이상, 그런 지옥 같은 공부는 하지 않겠어요."라고 튕겨져 나갔다.

남편이 그동안 학원강사로 쌓아온 이력이 있어서 가능했겠지만 자기 자식을 직접 공부시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점차 서로에게 미움이 쌓였고, 미움은 증오로 바뀌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손 떼자. 기초를 닦아놓고, 그동안 뒤떨어진 공부를 따라잡아놓았으니 혼자서도 잘할 거야."

나는 남편을 설득했다. 이제 손을 떼자고. 근처의 학원에 보내자고.

우리는 아이를 믿기로 했다.

그렇게나 뒤쳐져서 따라갔음에도 끝까지 포기하기 하지 않은 그 끈질김을..


아들은 혼자 공부하다가 힘들면 근처 학원의 도움을 받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아들은 꾸준히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목표했던 교대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

장애인특례제도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내신 성적이 좋지 못했다면 원서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중 1학년의 겨울방학이 아들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그 치열했던 공부의 경험은 아들에게 열패감을 극복하고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지금 아들은 초등교사 2년 차이다.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 청력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지만 옆에서 도와주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 덕에 예상보다 수월하게 적응해 나가고 있다.

어엿하게 교사가 된 것만 해도 대견하다고 생각되지만, 스스로를 '하자(瑕疵)있는 인간'으로 지칭하면서 연애도 결혼도 안하겠다고 말할 때는 여전히 마음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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