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날
"뭐라고요? 아니... 그걸.. 왜 버려요? 이를 어째. 아이고. 이를 이를 어째."
내 목소리는 더 이상 길게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뭐라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그전날 왼쪽 와우기계를 학원에 놓고 온 아들은 기계를 찾으러 학원에 다시 갔었다. 그런데 친구가 호기심에 기계를 가져가 버렸다고, 다음날 만나서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날 아들은 친구를 만나 기계를 받으려고 했는데, 친구 엄마가 나에게 그 기계를 버렸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지금은 인공와우기계를 잃어버리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아들은 가끔 기계를 잃어버리곤 했다.
기계 한 개 값은 무려 천만 원이나 했다. 이것저것 다 되는 고기능의 컴퓨터도 몇백만이면 사는데, 소리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주는 손가락만 한 기계가 천만 원이라니. 틀림없이 원가는 몇 십만 원도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청각장애인만을 위해 개발된 특수한 기계이니만큼, 사용하는 이가 많지 않을 터였고, 그 기계값에는 연구 개발비가 포함되어 있을 거였다. 또한 그걸 만드는 회사가 세계에서 몇 되지 않으니, 독점적 가격형성도 비싼 이유 중 하나일 거였다. 너무 비싸지만, 소리를 못 듣는 아들에게 소리를 듣게 해 주니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보물 같은 기계였다. 그런데 이 철부지 아들은 기계 간수를 잘하지 못했다.
그때 아들은 고3이었고, 나는 혼자 운영하는 약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장 약국문을 닫고 그곳으로 달려가 재활용통을 뒤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단지, 이를 어쩌나? 하고 신음소리만이 나왔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엄마는 왜 그렇게 성급히 기계를 버려버렸지? 애는 왜 기계를 가져갔고.... '
나는 그 엄마의 경솔함이 원망스러웠다.
"그게.. 천만 원이나 하는 기계거든요. 그 기계가 없으면 아이가 소리를 못 듣거든요. 근데 그걸 왜 버려요?"
그제야 친구 엄마는 자기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어머나. 난 우리 애가 못쓰는 기계를 호기심에 가져온 줄 알고.. 쓰레기 통에 있는 걸 주워왔다고 했거든요."
아이가 흘린 걸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버렸을 수도 있고, 그걸 친구가 집어갔을 수도 있겠다.
야무지게 간수하지 못한 아들 잘못이 제일 크지만, 그걸 친구가 집어 가지만 않았어도 아들이 학원에 다시 갔을 때 찾아올 수 있었을 텐데... 아들도, 친구도, 그 엄마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저질러진 물.
"그거 다시 찾아 봐 줄 수 없나요? 제가 달려가고 싶지만 약국 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요."
"그럴게요. 찾아볼게요. 나는 버려도 되는 건 줄 알고.. 죄송해요."
나는 근처에 사는 아는 이에게 연락을 하여 같이 재활용통을 뒤져 봐 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커다란 재활용 통을 뒤집고 하나하나 헤쳐서 겨우 기계를 찾았다고 했다.
그때 아들의 기계 분실 사건은 한차례 해프닝으로 끝을 맺었지만 아들이 기계를 잃어버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아들이 중학생 때도 기계를 잃어버려 한차례 집안이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는데, 우리가 도서관에 간 사이 아들은 기계를 잃어버렸다.
"틀림없이 집안 어디엔가 있을 거야. 너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으니까, 기계가 어디에 갔겠어?"
하면서 찾아보았으나 집안 어디에서도 기계는 나오지 않았고, 그날 아들의 행적을 시간별로 추적하다가 아들이 우리 몰래 피시방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나는 피시방까지 찾아가 아들이 앉았던 자리며 시시티브이를 확인했지만 기계는 끝내 찾지 못했다.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것도 괘씸했고, 게임에 정신이 팔려 자신에게 소중한 기계를 그렇게나 소홀히 했다는 것도 용서가 안되었다. 우리는 무척 화가 났고, 급기야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두고두고 아들에게나 우리 부부에게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렇게 아들을 폭력적으로 대해서는 안되었는데.. 아들은 그날을 쉽게 잊지 못했고,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서에 분실 신고를 하고, 그 신고서를 들고 기계회사에 찾아가 할인된 값에 기계를 다시 사야 했다.
초등학생 2학 때도 기계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이었는데 학교에서 집으로 온 아이의 귀에는 기계가 없었다. 가방에도, 호주머니에도....
그때는 왼쪽 귀는 아직 수술 전이라, 오른쪽 기계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기계를 잃어버린 아이는 전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와 나는 필담을 나누어야 했다.
기계는 어떻게 했어?
잃어버렸어요.
어디서? 어떻게?
지훈이가 그랬어요.
그때도 내 가슴은 타들어가는 듯 답답했다. 기계를 어떻게 찾나?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건가?
일단 지훈이네 집을 찾아가 물어보았는데, 지훈이는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집에 오다가 눈싸움을 하고 놀다가 헤어졌을 뿐이라고.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눈싸움을 한 장소를 찾아갔다. 그곳을 뒤지다가 눈 속에 파묻힌 기계를 찾아냈다.
아이는 노느냐고 정신이 팔려 기계가 떨어지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미끄럼틀 아래, 볼풀장에서 기계를 찾은 적도 있고,
어느 날은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기계가 귀에서 떨어져 감쪽같이 사라진 적도 있었다. 분명, 이 자리에서 떨어졌는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남편과 아들과 셋이서 몇십 분 동안을 주변을 살피고, 땅을 살피고, 하수구까지 살폈는데,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어디로 갔나? 4차원의 세계로 날아갔나?
날은 점점 어두워 오는데 우리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고개를 숙이고 여기저기 살피기만 했다.
그러다가 자전거 안장 안쪽에 기계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시름 놓았다.
기계를 간수하는 일은 아이에게 큰 스트레스일 거였다. 밤마다 충전을 시켜 놓아야 하고,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든 날은 건전지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챙겨가지 못한 날은 언제 기계가 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도 듣게 해주는 기계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마움인가?
그 기계가 없었다면 아이의 인생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말도 지금처럼 할 수 없었을 테고.
아이에게 필수적인 기계이니만큼 가격이 좀 더 합리적으로 저하되었으면, 그래서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기계로 바꾸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