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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귀한 아들 08화

일반 학교로

아이는 항상 뒤처졌다

by 이사라

수술을 하고 얼마쯤 지났을 때, 애화학교 모자교실도 끝이 났다. 어린이집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때 집 근처의 일반 어린이집으로 옮기자고 결심을 했다.

둘째가 일반 어린이들과 어울려서 잘 지낼까? 잘 듣지 못한다고 괴롭힘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나는 아이가 일반아이들과 어울려서 살기를 바랐다. 그것이 아이에게는 힘든 도전이겠지만 아이의 인생에 더 많은 발전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했다.


학교 강당에서 청각장애 학생들이 부르던 합창을 들은 후 그런 결심은 더 굳어졌다.

학교 축제일이라 강당에서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합창을 한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과 강당에서 합창을 들었다. 학생들이 무대에서 수화와 더불어 목소리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불렀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아이들이 부르는 가사는 알아듣기 힘들었고, 음정도 맞지 않아 노래가 아니라 함성처럼 들렸지만,

아이들이 정성껏 부르는 노래는 어느 누가 부르는 노래보다 마음을 아프게 울렸다.

노래가 어떠했는지는 묘사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그때 마음이 몹시 아팠고, 충격을 받았고, 많이 울었다는 것만이 기억이 난다.

장애아를 키우기 위해 그렇게 오래 참아야 하고, 믿고 참아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둘째가 일반 어린이집으로 옮기고, 일반 학교에 다니고 적응하기까지 쌍둥이 형이 옆에 있다는 것은 둘째에게 큰 행운이었다. 1분 일찍 태어난 첫째는 둘째의 친구이자 조교였다. 그나마 형이 있어서 둘째를 안심하고 일반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둘째에게는 놀이이자 공부였다. 우리는 첫째에게 노래를 본보기를 시키고 둘째를 따라 하게 하곤 했다. 첫째는 한 개를 가르치면 열 개를 알아내곤 했는데, 둘째는 열 개를 가르치면 한 개를 알까 말까 했다.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꾸준히 언어치료실을 다녔다. 4살쯤 되자 자기주장이 강해지고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아졌지만, 엄마인 나조차 아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아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이는 고집스러워졌고, 변화를 싫어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힘들어했다.

어느 날은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려는데, 아이가 한사코 "압지~, 압지~" 하면서 발버둥 치면서 울었다.

압지? 압지가 뭐야?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것저것 가져다줘보고 나서야 아이는 자기가 입고 있었던 바지가 맘에 안 들었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의 발음은 부정확해서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끝내 알지 못했던 적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절망감을 느꼈으리라.

언어치료실을 가던 어느 날은 손가락으로 벽에 지직 뭔가를 그리고는 이거 머야? 하고 물었다.

그것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아이는 집요하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아이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급기야는 소리 지르며 울었고, 결국 토하기까지 했다.

그때 엄마로서 느꼈던 나의 무력감이란. 엄마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 하고 아이를 달래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첫째 아이는 알려주는 데로 스펀지처럼 쏙쏙 받아들이는데 둘째는 왜 이렇게 느리고 힘이 들까. 그것이 청각장애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중복장애, 이를테면 자폐성향 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둘째는 모든 면에서 일반아이들보다 뒤처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치른 첫 시험에서 둘째는 꼴찌를 했다. 그것도 한참이나 뒤쳐진 꼴찌였다.

학교에서 집에 온 아이를 날마다 옆에 끼고, 수학이나 국어를 가르쳤지만, 좀처럼 따라가지 못했다.


아이는 읽고 이해하는 것이 한없이 느렸고, 답답했으며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급기야는 국어 점수 28점을 맞았다. 학급 평균이 70점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방과 후 부진아 특별학습을 하겠다고 연락을 해 왔지만, 나는 집에서 시켜보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학교에서 선생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고, 선생님도 아이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찌해야 하나? 학원을 보낼 수도 없고. 나는 날마다 남편에게 둘째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했다.

남편은 그때, 학원강사를 하고 있었다. 날마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남편이 하는 일이었지만, 둘째에 대해서는 포기하라고 나에게 말했다.

마음 편히 먹으라고, 공부는 포기하라고,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어떻게 포기하란 말인가? 지금 손을 놓으면 영영 뒤처질 텐데... 징징거리면서 꼴찌를 하면서라도 나는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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