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때부터 조기 교육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둘째를 데리고 애화학교 모자교육센터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 아산 병원의 이광선교수님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분은 몇 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그 당시에는 인공와우 수술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었다. 미소를 띤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주신 교수님은 둘째의 상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여러 검사를 해 본 결과 달팽이관 기형으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라며 인공와우 수술이 최선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내가 하혈을 하고 병원에 입원했던 임신 11주 차의 그때에 달팽이관 형성되다가 잠시 멈추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임신 후 일을 그만두었다면, 임신기간 어느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만 꼼짝 않고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로 오랫동안 괴로웠다.
아이가 너무 어리니 일단 보청기를 착용하고 1년 정도 아이의 반응을 본 다음에 인공와우수술을 한쪽만 하자고 하셨다. 다른 쪽은 혹시 미래에 나올지도 모르는 더 좋은 치료방법을 기대하여 남겨놓자고 하셨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같이 수술하지 않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래서 둘째는 보청기를 끼고 일주일에 두 번 애화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애화학교에서는 소리 듣는 연습과 발성하는 연습을 했다. 아이들이 어렸기 때문에 엄마들이 아이를 안고 수업에 참여를 했다. 그 당시 돌 전후한 같은 또래의 아기들은 모두 20명 정도 되었고, 두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했다. 애화학교를 다니면서 같은 처지의 엄마들을 만나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위로를 주고받았던 것이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때 만나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엄마들은 그 이후 각자 흩어졌어도 아직까지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서로의 고민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수업시간은 일주일에 몇 시간 되지 않았지만 나는 수업 중에 배운 것을 집에서 둘째와 늘 놀이처럼 해야 했다. 학교에서 수업 듣는 것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실제 아이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받는 교육이 중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나의 일상은 아이의 교육으로 채워졌다. 나는 엄마이자 아이의 선생님이 되었다. 아주 어린 아기는 하루하루가 발전하며 성장하는 시기였고, 그 시기를 놓치면 아이에게는 영구적인 장애로 남게 될 것이었다.
아~ 하는 소리를 길게 내는 것조차 아이들은 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했다. 북을 쳐보기도 하고, 촛불을 불어보기도 하고, 혀운동을 시켜기도 했다.
그리고 매칭연습을 했다. 각 사물에는 사물에 해당하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은 중요한 교육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사고를 불어넣어주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그래서 연관성이 있는 것들을 짝을 짓는 연습도 많이 했다. 사물과 사물 간의 연관성을 찾는 놀이 등등.. 아이가 듣지 못해도 사물에 대한 개념을 익히고 파악하도록 연습을 시켰다.
들을 수 있는 아이는 저절로 소리를 익히고, 사물들의 이름을 알아내며 말을 하게 되지만, 듣지 못하는 아이는 옆에서 하나씩 가르쳐야 했다.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발성연습을 시키고, 혀가 굳지 않도록 혀운동을 시키고, 호흡이 길어지도록 길게 숨을 내쉬는 연습을 시켰다. 아기들에게는 말을 배우는 시기가 있는데, 그때를 놓쳐서 말을 배우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둘째의 교육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학교를 다녀온 후면,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집에서 연습을 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끊임없는 소리를 들려주어야 했으므로 나는 집에서 아이와 인형놀이를 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엄마가 밥 먹어. (소꿉놀이를 하면서 인형에게 밥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아가가 밥 먹어. (아기 인형에게 밥을 먹이는 시늉을 한다)
엄마가 뭐 해? 엄마가 잠을 자. (인형을 침대에 눕혀 놓는다.)
아가가 뭐 해? 아가가 잠을 자 (아기 인형을 침대에 눕혀 놓는다)
하루 종일 둘째와 떠들고 둘째가 잠이 들면 그제야 쉴 수 있었다. 입을 다물고 쉬고 있으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TV도, 책도, 취미도, 직장도 모두 그만두고, 오로지 아이에게 매달려 지내던 시기였다.
남편은 아이에게 '아빠 사랑해'하는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다.
나는 남편과 둘이서 아이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노래는 할 수 없겠고 피아노도 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다리가 건강하니 등산은 같이 할 수 있겠을 것이다. 여행도 같이 다닐 수 있을 테고,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수영도 할 수 있을까? 듣지 못하는데 수영을 배울 수 있을까?
아이는 자라서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화가가 될 수 있을까? 보는 눈이 다른이 보다 예민할 테니 조금 유리하지 않을까? 그런데 남편이나 나나 그림을 못 그리는데, 둘째도 우리를 닮아 화가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막연한 말들을 나누었다. 앞으로 아이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아이가 어떤 일들을 겪으면서 살게 될지 막연하던 시기였다. 친구들은 사귈 수 있을까? 귀머거리라고 놀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과 불안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쾌하던 날들이었다.
자식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부모는 그저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이라고..
아버지가 최선을 다했지만 뇌종양으로 둘째 언니를 잃으시면서 겪었던 심정을 담아 나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 말씀이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보청기를 끼워도 아이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첫째는 제법 옹알이도 하고 말귀도 알아듣고, 뭐라 뭐라 말 비슷한 것들을 쏟아내는데, 둘째는 여전히 침묵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효과가 있었는지 몇 달 후 아~~ 하고 길게 소리를 냈다. 사람의 목소리 같은 소리를 처음 내던 순간이었다.
"ㅇㅇ이가 소리를 내네요." 애화학교 선생님께서 박수를 쳐 주셨다.
그리고 22개월이 되었을 무렵, 드디어 아산병원에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