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 미뻐
인공와우 수술은 귀 뒤쪽을 절개하고 그곳에 구멍을 내어 달팽이관까지 이어지는 전극을 심는 수술이다. 외부의 음향처리기를 귀에 부착하고 있어야 하며, 소리는 이 음향처리기를 통해 디지털신호로 바뀌어 내부의 임플란트를 통해 청신경에 전달된다. 인공와우를 통해 뇌로 전달되는 소리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듣는 소리와는 다르다. 마치 주파수가 잘 맞지 않는 라디오에서 로봇이 내는 소리 같다고도 하는데 그 소리를 들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전기적 신호가 청신경에 전달되는 것으로 소리를 인식하므로 꾸준한 맵핑과 청능훈련으로 그 신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은 고도 난청이라면 누구나 인공와우 수술을 고려하게 되었지만 25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수술한 사례가 많지 않았고 보험도 되지 않았다. 한쪽 귀의 수술비용도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가량 들었다. 수술한 후에 효과가 어떨지에 대해서도 뚜렷한 정보가 없었다. 수술을 한다고 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몇 년의 청능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둘째가 다니던 애화학교의 아기들은 두 돌 무렵이 되자 하나둘씩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도 22개월이 되던 때 드디어 아산병원에서 인공와우 수술을 받았다. 왼쪽은 약간의 (별로 의미는 없지만) 잔청이 있으니 전혀 듣지 못하는 오른쪽 귀만 수술을 받았다.
이광선 교수님은 둘째에게 달팽이관의 기형이 있어서 효과가 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피아노 건반이 모두 있는 것과 3분의 2만 있는 것에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영역에 차이가 있잖아요? 달팽이 관도 모두 온전한 것과 3분의 2만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같은 수술을 받았어도 달팽이관에 기형이 있으므로 효과가 적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간혹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한 친구도 있다. 청각장애뿐 아니라 중복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한쪽 귀만을 수술하고, 다른 쪽 귀는 혹시 미래에 나올 수도 있는 더 좋은 기술을 기대하여 남겨 놓기로 결정하였다. 오른쪽 귀를 수술하고 몇 주 후 상처가 아문 뒤에 외부 어음처리기를 부착했다. 그 당시에 처음 받은 어음처리기는 지금의 스마트폰보다 더 두껍고 무거웠다. 옷에 주머니를 만들고 어음처리기를 넣어주어야 했다. 지금은 크기가 작아져서 귀에 걸고 있으면 마치 이어폰처럼 여겨지고, 아예 머릿속에 부착할 수 있는 것도 있어서 겉으로도 표가 나지 않는다.
수술을 하고 달라진 점은 보청기를 착용했을 때보다 더 예민하게 소리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수술을 하고 나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병원에 주기적으로 다니면서 맵핑(기계의 출력을 개개인의 상태에 맞게 조율하는 것)을 했고, 언어치료실에서 청능훈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아산 병원에 있는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고, 나중에는 사설 치료실을 데리고 다녔다. 잘한다고 소문난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카페에서 알게 된 유명한 언어치료사 OOO선생님을 찾아갔던 일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선생님은 보청기 피팅에 능력이 탁월하며 청각장애인들이 그 선생님의 지도하에 말을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예약하기도 힘들며 예약을 하고도 오래 기다려야 했다.
드디어 둘째를 데리고 힘들게 그 선생님을 찾아간 날, 선생님은 둘째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어느 방으로 우리를 안내하셨다. 그 방은 약간 어두웠고 방 한쪽에 인형들이 있었는데, 소리가 나면서 인형이 움직였다.
둘째는 낯선 환경이 무서웠던지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울어 댔다. 선생님은 몇 번 시도해 보더니,
"아. 이 아이는 할 수 없네요. 그냥 가세요." 하고 나가버렸다. 아기들이 낯선 환경에서 우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내쫓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둘째를 데리고 그 언어치료실에서 나오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도 많았을 텐데, 그때는 그저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조바심을 냈고 아이를 힘들게 했다. 조금 천천히 가도 좋았을 텐데.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엄마가 되어 본 것도 처음이고, 더구나 청각장애아를 키우는 것도 처음이라서 늘 긴장을 하고 아이를 다그쳤다.
세 돌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 애화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둘째는 드디어 말을 했다.
어바. 어바. 하고
엄마인지 아빠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는데, 옆에 차를 같이 타고 있는 남편을 보고 그 말을 한 것을 보면 아빠,라고 부른 것이 분명했다. 그 후로도 성인 남자를 보면 누구를 보던 어바. 하고 불렀다.
또 어느 날, 둘째는 드디어 말다운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거실에서 장난감 말을 타고 놀다가 소파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씩 웃으며 "어마 미뻐~ " 하고는 얼른 달아난 것이다.
처음으로 두 가지 단어를 이어 붙어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엄마 이쁘다는 소리인지 밉다는 소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척 감격스러웠다.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 말을 내뱉고 얼른 달아난 걸 보면 '엄마 미워'이었겠지만. 그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엄마에게 농담을 건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