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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귀한 아들 05화

전혀 못 듣는데요

못 들어도 정을 주고받을 수 있어

by 이사라

기억도 못할 수많은 날들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지만, 과거의 어느 날은 마치 액자에 걸어놓은 사진처럼 고정되어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처럼 여겨진다.

내가 둘째의 청각장애를 처음 진단받은 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이다.

그 전날 둘째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수면 청력검사를 받았고, 아침에 나는 이비인후과에서 결과를 들었다.

"전혀 못 듣는데요. 전농이에요."

의사의 단정적인 말이 내게 꽂히는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둘째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소리가 없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듣지 못하면 말도 못 할 텐데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당연한 것을 물었다. 마치 다른 뾰죡한 수라도 찾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수화를 가르쳐야지요. 같이 수화를 배우고."

그 당시 그 이비인후과 의사는 인공와우 수술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근무하는 약국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일에 손대지 못하고 마치 물풍선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처럼 계속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결과가 궁금했던 남편이 전화를 하였다. 둘째가 전혀 듣지 못한다는 내 말을 듣고 남편이 말했다.

".. 괜찮아... 못 들어도 정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어. 그 정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어... 너는 오늘 사표를 내. 돈은 내가 벌게."

남편도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의 인생이 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나에게 그렇게 위로를 했다. 남편의 그 말이 내 마음을 너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말해 주어서 고마웠다.

괜찮다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잘 키울 수 있다고.


나는 그 병원에서 일한 지 10년 근속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은 조그마한 대학병원이었지만 곧 신축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그 병원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직장 동료들도 좋았고, 병원 분위기도 좋았다. 남편은 박사논문을 준비 중에 있었고, 학자로 살아갈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의 인생계획은 그러했지만 그 순간 모든 것들이 변해 버렸다.


나는 그날 사표를 썼다. 동료들이 쌍둥이의 돌선물이라면서 봉투를 모아서 내게 주었다. 휴가 중이던 후배약사가 내게 전화를 하여

"약사님, 요즘에는 수술을 하면 말도 할 수 있대요. 너무 슬퍼하지 마요."

하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수화는 어디서 가르치고, 재활은 어떻게 해야 하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연세 세브란스 병원의 소아재활의학과에 무작정 찾아갔다. 거의 1시간 이상을 기다려 받은 결론은 그곳에서도 수화를 가르치라는 말 밖에 없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청각장애카페에 가입하고 그곳에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서울에 있는 애화학교 모자교실을 찾아가라는 거였다. 장롱면허였던 나는 남편에게 운전 연수를 받고, 아이를 차에 태우고 애화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애화학교는 수유리에 있는 청각장애 전문학교이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원감 선생님과 상담을 하였다. 아이의 상태는 어떤지, 청각장애아에게 조기 교육이 왜 필요한지, 그곳에서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또 울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우는데, 선생님도 같이 우셨다. 그곳에서 매일 나와 같은 엄마들과 상담을 하실 텐데.. 선생님이 나를 따라 우시다니... 선생님은 매일 우시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 눈앞에 커다란 검은 불행이 입을 벌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것. 인생에서 벌어지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전적으로 불행만을 몰고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일들을 헤쳐오면서 동반하는 커다란 기쁨 또한 내게 가져다주었으니... 그 일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많은 것들을 지금도 느끼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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